오늘 브런치 하셨나요?
글감에 그다지 구애받는 편은 아닙니다.
아, 이렇게만 써놓으면 오해를 하실 수도 있겠네요.
특별한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제 인생에 남들은 해보지 못한
독특하고 특별한 경험은 딱히 없을 것 같아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에서
의미를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글감에 구애받지 않으니
글쓰기가 참 편할 것 같다고요?
주변이 죄다 글감이니
그냥 키보드에 손만 올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그게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글감엔 구애를 받지 않는 편인데
그 글감들로 글을 쓰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글감은 많은데 '글깜(글을 쓰는 깜냥)'이 안되는
매우 서글픈 상황인 거죠.
글을 쓰고 싶으면 브런치를 엽니다.
가끔 글감이 생각나서 브런치를 열 때도 있지만,
보통은 브런치를 열어 놓으면
글감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턱을 괴고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글감이 떠오릅니다.
운이 좋은 날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운이 좋은 날이 많지는 않으니
떠오르지 않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아무리 화면을 노려봐도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봅니다.
잠시 그렇게 창밖을 보고 있다 화면으로 돌아오면
노트북의 빈 화면이 다시 열렬히 저를 맞아줍니다.
어서 글을 토해내라고요.
이때입니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아무 문장이나 써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쓰고 있는 '글감과 글깜 사이'는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것도 글로 쓰면 좋을 것 같고
저것도 글로 쓰면 좋을 것 같은데
깜냥이 되지 않는 나는
소재가 많아 더 서글프네..
이렇게 쓰고 나서 제목을 뽑았습니다.
'글감과 글깜 사이'
이전 글의 제목이 '말투와 글투 사이' 여서
같은 형식으로 지은 건 아니었습니다.
짓고 보니 같더라고요.
물론 무의식적으로 제목을 세트로 맞추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까지는 저도 어찌할 수 없으니까요.
어쨌든 앞으로의 일을 저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매우 높은 확률로 '오늘 브런치 하셨나요'에
올라올 글들의 제목은 저 형식이 될 거라는 걸요.
제 고질병 중 하나입니다.
‘선천성미세부문집착증후군’
'아무도 관심 없는 것에 혼자 집착해서 고통받기'
정도로 풀어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대략적인 글의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이 소재로 이러이렇게 쓰고 저러저렇게 쓰다가
그러그렇게 마무리하면 되겠다.
하지만 누구나 계획은 있죠.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기 전 까진요.
저렇게 구성을 잡고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잖아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소재와 구성은 넘치게 흘러나오는데
이것들이 손가락을 통해 글자로 배출이 되지 않으니
얼마나 괴로울까요.
마치 아내와 딸이 샤워를 하고 나온 샤워부스에
마지막으로 들어가 머리를 감는 기분입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해바라기 샤워기에 물을 틀어 놓고
열심히 샴푸를 하고 있는데
발이 물에 잠기는 느낌을 받습니다.
놀라서 아래를 쳐다보면 배수구에 긴 머리카락들이
잔뜩 끼어있어 물이 내려가지 않아
화장실 바닥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는 상황인 거죠.
글감과 구성은 계속 흘러나오는데
문장으로 배출되지 못하는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던 샤워를 중단할 수는 없으니
머리에 거품을 잔뜩 묻히고 있는 이 가련한,
그리고 발가벗은 한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
배수구를 막고 있는 긴 머리카락들을
수거하기 시작합니다.
그제서야 갇혀있던 물들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배출되지 못하고 넘치고 있던 글감과 구성에도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때 쓰는 방법은 샤워부스와는 정반대입니다.
바로 압력입니다.
연결이 되지 않는 문장도,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도,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도,
가리지 않고 글자의 탑을 쌓습니다.
빈 화면이 글자로 점점 채워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연결이 되는 문장이 나오기 시작하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기 시작하고
문법에 맞는 문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마지막 마침표를 찍게 되는 거죠.
물론 이후에도 몇 가지 과정이 더 필요하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또 이야기하기로해요.
오늘 여러분들도,
브런치 하셨나요?
*사진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