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남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창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남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내리는 눈에 대웅전 앞마당이 하얗게 덮여가는 걸 보며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 멀리 산들도, 절 앞의 나무들도 모두 하얀 눈에 쌓이는 걸 바라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 이왕지사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버릴 거라면 내 화두도 함께 덮어다오.
한동안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대웅전 앞마당으로 나온 남자는 한쪽에 놓여있던 싸리비를 집어 들었다.
- 스님, 날이 춥습니다. 들어가 계시지요.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나갔다.
남자가 쓸고 간 자리는 새 눈으로 다시 덮였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싸리비질을 할 뿐이었다.
- 스님, 그러시면 이거라도 좀 두르시지요.
처음 쓸었던 자리를 다시 쓸고 있는 남자의 목에 회색 목도리가 둘러졌다.
남자는 목도리가 주는 온기를 느끼며 비질을 멈추었다.
- 불목하니 노릇도 이제 삼 년이 넘지 않았느냐.
- 네, 스님.
- 내가 화두만 품고 사느라 너를 품지 못했구나.
- 아닙니다. 스님. 부처님을 위해 물을 긷고, 부처님을 위해 불을 지필 수만 있다면 평생을 그리 살라해도 좋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어린 중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내 남자는 몸을 돌려 다시 비질을 시작했다.
- 저녁에 내 방에 잠시 건너오너라. 와서 내 화두 좀 나눠지거라.
싸악싸악 남자가 비질을 한다.
싸악싸악 새 눈이 비질을 덮는다.
* * *
호롱불 하나 켜놓은 방 안에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남자는 자신의 화두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남자의 마음속에서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남자는 마치 키우는 강아지처럼 자신의 화두를 어루만졌다.
화두가 점점 빛을 내기 시작했고, 남자는 어느 순간 방 안이 환해짐을 느끼며 감았던 눈을 떴다.
- 왔느냐.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낼 것이지. 그만 불을 끄고 이리 다가오너라.
말이 끝났음에도 방 안이 어두워지지 않자 남자는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 그만 불을 끄래도..
남자는 너무 놀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문이 있던 곳에선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이.. 이.. 무슨..
남자는 정신을 바로잡고,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그때 남자의 머릿속에 천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제 천둥같이 큰 소리가 난 것도 아니었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남자에겐 천둥과도 같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 새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이십 년 뒤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지금의 화두를 가지고
지금의 삶을 살 수 있겠느냐
남자는 마구니의 짓이라 생각하고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 사리자 시제법공상
(舍利子 是諸法空相)
불생불멸 불구불정 불증불감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그러자 남자가 좀 전까지 어루만지고 있던 화두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절반의 화두가 남자의 머릿속에서 녹아내렸다.
남자는 절반의 화두가 녹아내리며 주는 깨달음에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나머지 절반의 화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너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이십 년 뒤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지금의 화두를 가지고
지금의 삶을 살 수 있겠느냐
- 그리하겠습니다. 깨달음을 주신 이여. 분명 그리하겠습니다.
깨달음의 희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그리고 말이 끝난 순간 방안에 가득했던 빛이 사라지며 남자의 의식도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