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던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내리던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털벙거지를 뒤집어쓴 남자가 숨을 쉴 때마다 남자의 입에선 허연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내리는 눈 때문에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잠시 멈추어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한 언덕길이 보였다.
이 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언덕길의 초입에서 남자는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장갑 낀 손으로 힘주어 봉을 잡고 있던 남자가 잠시 손에서 힘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 인자 다 왔응께 조금만 더 힘내자고. 바닥 미끄러운께 조심허고!
남자의 시선 끝에는 중년의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세차게 날리는 눈발 속에서도 남자의 말을 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럼에도 남자가 고개를 돌리지 않자 여자는 잡고 있던 리어카의 뒷부분에서 손 하나를 떼어 남자를 향해 내저었다.
훠이훠이 어서 앞으로 끌고 가라고.
훠이훠이 내 걱정 말고 당신이나 조심하라고.
그제야 남자는 씨익 웃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다음 남자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
이어서 풍선에 바람 빠지듯 잔뜩 들이마셨던 숨이 그대로 토해져 나왔다.
길게 쏟아낸 남자의 숨에 내리던 눈송이 몇 개가 춤을 추듯 떠밀렸다.
남자는 손바닥을 몇 번 문지르고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단단히 고정한 왼 발에 온몸의 체중을 싣고 오른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쑤욱
왼발이 들리며 오른발이 눈 속에 박혔다.
다시 오른발에 힘을 주고 왼발을 내디뎠다.
쑤욱
이번엔 오른발이 들리며 왼발이 눈 속에 박혔다.
하지만 그 덕에 리어카는 삐걱거리며 골목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남자는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민다.
삐걱삐걱 한 바퀴 돌 때마다 리어카가 비명을 지른다.
리어카는 아주 천천히 골목길을 올라갔다.
함박눈이 내리는 밤길이라 혹 보이지 않는 얼음판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남자는 조심조심 앞을 살피며 리어카를 끌었다.
뒤에서 리어카를 밀고 있는 여자도 연신 바닥을 살피며 조심조심 발을 디뎠다.
골목의 중간쯤 올라왔을 때, 바로 앞 전신주에 매달린 등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꺼져버렸다.
순간적으로 골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당황하지 않고 리어카를 끌고 밀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바닥을 덮은 새하얀 눈이 남자와 여자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이 고생을 시키면서도 등 역할 하나는 해주는가벼.
암, 세상만사 다 그런뱁이지.
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남자는 혼자 속으로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자신이 이런 득도한 고승이나 할 법한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남자는 힘을 주어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리어카를 끌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저 멀리 골목 끝에 남자와 여자의 집이 보였다.
철로 된 녹색 대문집.
철제 녹색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활짝 열린 대문 앞에 몇 겹의 옷을 껴입었는지 뚱뚱한 눈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한 아이가 서있었다.
- 아빠! 엄마!
잔뜩 흥분한 눈사람이 저 아래 남자와 여자가 보이자 냅다 둘을 향해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 미끄러져 인석아! 조심혀!
남자는 자신에게 뛰어 오는 꼬마 눈사람의 발치를 살피며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눈사람은 남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어 엄마의 품에 안겼다.
- 아빠! 만두 사 왔어?
안긴 건 엄마의 품이었지만 질문은 남자에게 하는 눈사람이었다.
- 예끼! 이 녀석! 엄마아빠가 아니라 만두를 기다린 거였구먼!
- 헤헤, 아니야. 엄마아빠 보고 싶어서 아~까부터 나와 있었지. 엄마 많이 춥지? 이거 둘러.
여자의 품에 바싹 안겨있던 눈사람이 자신의 목에서 목도리를 풀어 여자의 목에 둘러주었다.
여자는 눈사람에게 다급히 손짓을 했다.
그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아니, 엄마는 괜찮아. 추운데 뭣하러 나와 있어. 감기 들라 어서 네가 둘러.
눈사람이 둘러준 목도리를 애써 다시 풀려하자 눈사람이 여자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 엄마, 이거 안 하면 나 안 들어간다?
눈사람은 엄마를 밀치고 리어카 뒤를 잡았다.
- 아빠! 오라이!
그 모습을 다 보고 있던 남자가 크게 웃었다.
- 하하! 그려, 오라이다 오라이!
집으로 들어온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오래되고 낡은 집이었지만 방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방 한 켠엔 삐뚤빼뚤했지만 빨래가 개켜져 있었고, 방의 가운데엔 철로 된 앉은뱅이 상이 펴져있었다. 그리고 작은 상 위엔 수저 세 쌍이 놓아져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겹겹이 입었던 옷들을 다 벗어버려 이제는 눈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장난꾸러기로 돌아온 아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남자와 여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와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웃옷의 지퍼를 내리고 품 속에서 검정 봉지를 하나씩 꺼냈다.
- 와 만두다!
여자가 방과 부엌을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마치 마법처럼 앉은뱅이 상위가 푸짐해졌다.
상 가운데엔 만두가 가득 쌓인 접시가, 수저 옆에는 밥이 가득 담긴 밥그릇 세 개가 자리를 잡았다.
만두 접시 옆에는 빨갛게 잘 익은 총각김치가 한 자리를 차지했고 마지막으로 작은 간장 종지가 놓이며 상이 완성됐다.
- 맛있겠다!
아이가 젓가락을 들어 만두를 집으려 하자 엄마가 자신의 젓가락을 들어 막았다.
한 손으로 아빠를 가리키는 여자의 모습이 마치,
- 아빠 먼저 드셔야지!
라고 하는 것 같았다.
- 헤헤 알았어. 아빠 빨리!
만두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며 남자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만두를 하나 집자마자 아이는 만두를 집어 볼이 터져라 욱여넣었다. 남자와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그런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미 볼이 빵빵한 아이가 만두를 하나 더 집어 입속에 욱여넣자 두 사람도 바쁘게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왜 오밤중에 불을 켰대.
남자는 감은 눈을 뜨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 볼 일 끝났으면 싸게 꺼. 전기세는 뭐 공짜단감.
말을 했음에도 한참 동안 감은 눈꺼풀 위로 빛이 쏟아지자 남자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환한 빛이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너무 밝은 빛에 남자는 눈이 부셔 오른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분명 세 식구가 다 같이 방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남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누군가의 육성이 들려온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고는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너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이십 년 뒤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지금의 가족들과
지금의 이 삶을 살 수 있겠느냐
꿈인가. 아니야. 꿈이 이렇게 생생할리가 없지.
내가.. 혹시 죽은 건가.
아이고 어쩌나. 말도 못 허는 마누라는 어떻게 살라고!
동열이 이 천둥벌거숭이를 두고 내가 어떻게 눈을 감을 수가 있당가!
아이고아이고 내가 가버렸네
아이고아이고 내 식구들 어떡허나.
다시 묻겠다.
너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이십 년 뒤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지금의 가족들과
지금의 이 삶을 살 수 있겠느냐.
- 암요! 당연허지요! 말도 못 하는 애 엄마, 내가 아니면 누가 건사하건디요.
글고 애 엄마랑 살아야 우리 동열이도 다시 만날 거 아닌가비요.
지는 몇 번을 다시 살라고 혀도 집사람허고 제 새끼데불고 살 부벼가면서 그렇게 살을랍니다.
우리 세 식구 다 같이 밥상에 둘러앉아 찬은 없어도 서로 떠먹여 줘 가며 그렇게 살을랍니다.
환한 빛 속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남자는 조바심이 났다.
- 아이고 하나님! 부처님! 천사님! 그 어느 분이신지는 제가 배운 게 없어 잘 모르겠지만,
집사람 허고 동열이, 우리 세 식구 꼭 붙어살 수 있게 해주씨오.
내 여태 살면서 단 한 번도 꽁으로 떨어지는 걸 바란 적이 없단께요.
그저 저 고물 리어카 하나에 과일 쪼매 떼다 팔면서 우리 세 식구 없어도 서로 애껴주며 살았단께요.
부디 제발 그렇게 해주쇼. 제발..
남자의 목소리에 점점 울음이 섞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남자는 거의 울부짖었다.
환한 빛이 가득한 방 안에서 남자는 울부짖다 결국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