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비친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남자는 가게일이 끝나면 매일 여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늦은 시간이라 그저 여자와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 둘이서 손을 잡고 천천히 동네를 걸으며 여자의 하루에 대해 물어보고 자신의 하루를 얘기해 주는 그 평범한 시간이 남자에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느 봄날, 남자는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남자는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몰랐다. 왜 이제야 그 말을 하냐며 오늘도 안 했으면 뻥하고 차버렸을 거라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여자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려 그 자리에서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결혼을 한 뒤로 가게는 더 잘 되었다. 여자도 회사를 그만두고 가게 일을 도왔다.
정직하고 믿음직한 남자와 알뜰하고 친절한 여자가 가게를 보는데 어떤 손님이 싫어할까.
모든 게 다 완벽했지만 딱 한 가지 부부에겐 고민이 있었다.
부부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병원도 여러 번 가보았지만 두 사람 모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답만 되풀이해서 듣고 왔다.
몇 번의 시술 끝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남자는 여자에게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위로를 했고,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여자를 남자는 지극히 아꼈고, 두 사람은 아이가 없어도 서로 의지하고 보듬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 * *
어느날,
화장실을 다녀온 여자가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여자의 얘기를 듣자마자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세 달 뒤 여자는 병원에서 남자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었다.
한동안 남자는 가게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단골손님들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냐며 도시락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빵이며 떡이며 가져다주었지만 남자는 음식을 입에도 댈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음식을 삼키면 삼킨 음식과 위액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손님들은 알아서 물건을 가져가고 알아서 남자의 앞에 돈을 두고 갔다. 하지만 새로운 물건을 가져오지도,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지도 않는 가게가 오래갈 리가 없었다. 가게는 점점 황폐해져 갔고 이따금 오던 단골손님들도 발길이 뚝 끊겼다.
남자는 가게를 정리했다. 살던 집도 정리했고, 세상과 얽힌 것들을 모두 정리했다.
모든 걸 정리한 남자는 산으로 올라갔다. 이전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갔던 절이 있었다. 아이가 생기길 빌며 부처님께 빌었던 절이었다. 노승과 동자승이 남자를 알아보고 객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남자는 객방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하루 종일 경내를 청소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 * *
어느 날 노스님과 함께 아침공양을 하는 중이었다.
노스님이 남자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 시주가 청소를 다 하느라 저 어린놈이 여간 게으름을 피우는 게 아니니.. 이제 청소는 그만하시게.
- 아닙니다 스님. 그거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 대신 다른 걸 청소하게.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스님을 쳐다보았다.
- 오늘부터는 방에서 참선을 하면서 자네 마음을 청소해 보시게. 혹시 아는가 그 와중에 뭔가 건지는 게 있을지.
그날부터 남자는 방에서 참선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가부좌는 여간 힘들고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공양 시간도 잊을 정도로 참선에 몰두했다.
점심공양을 건너뛰더니 얼마 뒤엔 아침공양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참선에 몰두했다.
처음엔 죽은 아내의 모습이 매일같이 떠올랐다.
왜 아이를 가지려고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후회의 눈물도 흘렸다.
매일같이 후회하고 매일같이 울었다.
후회와 눈물도 정해진 양이 있는 것인지 그렇게 다 쏟아붓자 신기하게도 남자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언젠가부터 참선을 시작하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남자의 머릿속은 완벽한 무(無)의 공간이 되었다.
남자는 점점 무(無)에 동화되어 갔다.
* * *
그날은 아침공양도 거르고 참선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남자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무의 공간에 자신이 있는 건지, 자신 속에 완벽한 무의 공간이 생긴 건지.
작은 의문이 생기자 완벽한 무의 공간이 조금씩 깨어지기 시작했다.
깨어진 틈으로 좁쌀만 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남자는 신기했다.
좁쌀만 한 무언가가 남자의 완벽한 무의 공간에서,
아니 이제 일부분이 깨어져버려 완벽하다는 표현을 쓸 수도 없고,
좁쌀만 한 무언가가 들어와 무의 공간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게 된 공간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남자는 좁쌀을 잡으려 손을 뻗으려 했다.
손을 뻗으려는 생각이 들자마자 공간의 여기저기서 손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백 개가 넘는 손으로도 좁쌀을 잡지 못했다.
남자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물을 짜기로 했다. 좁쌀을 건질 수 있을 만큼의 촘촘한 그물을.
한 올 한 올 남자는 그물을 짜는데 온 정신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물이 완성되었다.
그물은 무척이나 촘촘해서 아주 작은 티끌하나까지도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는 좁쌀을 향해 남자가 그물을 던졌다.
남자는 천천히 던졌던 그물을 당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물 속을 살펴보았다.
별안간 그물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물 속에 잡혀있던 좁쌀이 커지고 있었다.
남자는 신기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급기야 좁쌀은 남자의 머리통만큼 커졌다.
남자의 머리통만 하게 커진 좁쌀이 반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절반의 좁쌀이 터지며 그 속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남자의 머릿속에선 수만 가지 장면이 흘렀다.
남자는 리어카를 밀었다가
방에서 좌선을 했으며
아내와 아이와 둘러앉아 만두를 먹다가
눈이 내리는 길을 혼자 걸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고
공장에서 일을 했으며
농사를 지었다.
물고기를 잡다가
사냥을 했으며
살인을 했다.
수 백, 수천 번의 인생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남자는 매 인생이 흘러갈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죽은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이 흘러갔고,
아내의 손을 잡고 밤길을 산책하던 모습이 흘러갔다.
아내와 함께 일했던 가게가, 함께 모은 통장을 보며 마주 웃던 모습이 흘러갔다.
이제 더 이상 남자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까지 모두 흘러가자 남자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나머지 반쪽의 좁쌀이 터졌다.
처음 반쪽이 터졌을 때 보다 더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남자의 머릿속으로 엄청난 깨달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그 엄청난 희열에도 남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 그대로였다.
* * *
밖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시주님, 시주님 괜찮으세요?
동자승이었다.
- 동열아, 시주님은 별일 없으시냐.
- 노스님, 시주께선 아무 대답이 없으십니다.
남자는 동자승의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다.
툭
남자와 세상을 잇는 모든 인연이 끊어졌다.
덜컥
방문을 열고 동자승이 뛰어 들어왔다.
- 스님! 스님! 시주님께서.. 시주님께서..
- 왜 호들갑이냐.
동자승의 부름에 뒤따라 들어온 노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비친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 성불하시게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