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 남2

남자는 미련 없이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by 박나비

남자는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십 년 전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는 극심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 * *

매일 남자의 방에 쌓여있는 술병을 치우면서도,

건드리지 말고 나가라는 남자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도

동자승은 남자가 불쌍했다.

자신도 노스님의 죽음이 슬펐다.

한 번씩 마을에 내려갔다 오시면 자신의 손에 과자를 쥐어주시던 노스님이 계속 생각이 났다.

남자도 그러한 것이리라.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남자의 방에 술병을 치우러 간 동자승은 깜짝 놀랐다.

방안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 왔느냐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동자승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매일 술에 취해 살았기에 양 볼은 홀쭉했고, 몸은 바싹 야위었지만 남자의 두 눈만큼은 반짝거렸다.

순수하고 맑은 반짝임이 아니라 묘하게 사이한 느낌이 드는 반짝임이었지만 아직 어린 동자승에게는 그 둘을 구별할 만큼의 눈썰미나 노련함이 없었다.


그날부터 남자는 동자승을 데리고 전국 각지로 돌아다녔다.

전국의 고아원을 돌며 아이들을 데려왔고 데려온 아이들을 동자승으로 출가시켰다.

그러자 동자승을 위해 봉사하는 보살님들이 절로 모여들었다.

절간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넘쳐나는 건 사람만이 아니었다.

남자가 고아들을 위한 스님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절간의 살림도 풍족해졌다.

이제 남자는 본격적으로 절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대표이사, 절은 법인이었다.

남자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이제 제법 소년티를 벗은 동자승을 자신의 비서로 두었다.

남자의 머릿속에서 화두는 사라졌다.


깨달아서 사라지는 거나, 생각하지 않아 사라지는 거나 매한가지지.


아주 가끔 화두가 떠오를 때면 남자는 이런 생각으로 죄책감을 녹여버렸다.

남자는 밤마다 자신의 방에서 술과 고기를 몰래 즐겼다.

처음엔 동자승 몰래 즐기던 남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동자승에게 자신의 술과 고기를 챙기게 했다.

* * *

그날도 남자는 술이 흥건하게 취해있었다.

남자는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경내에 아직 보살님들이 있을 수 있다고 동자승이 말렸지만 남자는 듣지 않았다.


- 오면서 보니 대웅전쪽에는 아직 보살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리로는 걸음 하지 마십시오 스님.


동자승의 당부에도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을 쐬자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정신이 돌아오는 게 싫었다.

정신이 떠오르면 스승이 떠올랐고, 스승이 떠오르면 화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찬 바람을 쐬어 정신이 돌아온 남자의 머릿속에서 티끌만 한 화두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남자는 품속에 손을 넣어 술병을 꺼내어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주향이 풍겼다.

남자는 아무 대로나 걸음을 옮겼다.

대웅전 방향이었다.


* * *

동자승들의 저녁 식사까지 봐준 뒤 보살들은 모두 절을 내려갔다.

진주댁 한 사람만 빼고.

진주댁은 동자승들의 이불을 빨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불 몇 채만 더 하고 가기로 했다.

종아리를 걷고 빨래를 밟고 있던 진주댁이 인기척을 들었다.


- 늦게까지 아이들을 위해 고생이 많으십니다 보살님


- 아닙니다. 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진주댁은 남자에게서 독한 주향을 맡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번득거리는 것을 보았다.


- 저도 이만 내려가 볼 참이었습니다.


진주댁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남자에게 합장을 했다.


- 보살님, 이리 고생하셨는데 차나 한 잔 하고 가시지요


- 아닙니다. 다른 보살님들이 다 해놓고 간 걸 마무리만 한걸요. 이만 가게 해 주세요


- 보살님, 그러지 마시고 이리..


남자가 진주댁의 손을 잡아끌었다.

진주댁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적막한 절간을 깨웠다.

그때였다. 남자는 등이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남자는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더 아래를 내려 보았다.

흘러내린 피로 동자승들의 이불이 온통 빨갰다.

진주댁이 좀 전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동자승이 두 손에 부엌칼을 든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이미 정신이 나간 듯했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이십 년 전으로 왜 돌아온 건지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화두가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보았다.

남자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아니면 가슴을 찔려서인지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간신히 동자승의 손에서 칼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자신의 가슴, 피가 흘러나오는 곳에 칼끝을 갖다 댔다.

마지막으로 진주댁과 동열을 번갈아 바라본 남자는 미련 없이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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