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_자멸로 이끄는
"무…"
탁하고 갈라진, 그래서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한 음절.
"무울…"
여전히 탁하고 갈라졌지만,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단어.
1. 소리의 근원지
소리의 근원지는 한 남자의 입이다. 덥수룩한 수염이 소리의 근원지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었고, 잔뜩 메말라 갈라진 입술 주변과 빽빽한 수염들 사이로 정체불명의 음식찌꺼기들이 군데군데 눌어붙어 있다.
"물!"
드디어 정확한 발음으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세 번째로- 이전 두 번과 동일한 뜻의 한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는 더 이상 탁하지도 갈라지지도 않았지만, 아쉽게도 앞의 두 번과 결과는 같았다. 대화란 둘 이상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남자는 모르는 걸까.
갑자기 침대 위가 수직으로 높아졌다. 세 번의 시도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남자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하아… 죽겠네 진짜.."
눈도 뜨지 않은 채 상체를 일으킨 남자는 양 어깨와 허리에 힘을 줘 등을 활처럼 휘더니 이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잠시 미동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있던 남자가 힘겹게 양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렇게 남자에게는 찰나와도 같이 짧은 -지켜보는 우리에게는 꽤나 지루한- 십여 초가량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다시 고개를 천천히 바로 세웠다. 비로소 방안의 모습이 남자의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빈 와인병들이 남자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시선을 침대 맞은편 책상 위로 돌리니 말라비틀어진 음식 잔해가 담긴 접시가 보인다. 남자는 고개를 몇 번이나 절레절레 흔들고는 방의 나머지 부분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젠장…"
한숨과도 같은 욕지기를 짧게 내뱉으며 남자는 몸을 돌려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렸다. 아래를 보지도 않고 발바닥으로 바닥을 몇 번 쓸자 침대 밑에 널브러져 있던 슬리퍼가 남자의 발에 걸렸다. 뒤집어져있는 슬리퍼 한쪽을 용케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끼워 바로 세우더니 이내 두 짝을 모아 양 발에 걸치는 남자다.
껑충하게 말려 올라가 발목이 훤히 드러난 데다 물이 빠져 옅은 먹색의 추레한 트레이닝팬츠에 목이 늘어나고 색이 바래 누레진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파란색 줄무늬 슬리퍼를 신고 방안에 우두커니 서있다.
180 중반은 넘어 보이는 큰 키의 남자는 그 모양으로 한참을 서서 바닥의 빈 와인병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내디뎠다. 방문 앞에서 막 손잡이를 돌리려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처박더니 머리를 양옆으로 세차게 흔들어댔다. 잠시 그렇게 처박혀 있던 고개는 남자가 길게 숨을 한 번 내쉬자 위에서 도르래가 작동하듯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난 남자가 잡고 있던 손잡이를 돌림과 동시에 자신의 몸 쪽으로 힘주어 당겼다.
정확히 문이 열리는 각도만큼 방안의 어둠이 빛의 속도로 사라져 갔고, 빛의 속도로 사라져 간 공간은 그 자신의 속도로 짓쳐들어온 빛들에게 점령당했으며, 순간적인 눈부심에 최후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남자는 다급히 오른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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