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주 약간 서쪽으로 혹은 남쪽으로 치우친

알바_자멸로 이끄는

by 박나비

거실 가득 쏟아지는 늦은 오후의 햇살에 남자는 한껏 인상을 쓰며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지 않아 다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렇게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울렁이는 속과 흔들리는 머리 중 어느 쪽을 먼저 부여잡을지 망설이는 남자다.


잠시 후 남자의 한쪽 입 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그리고 묘하게 한쪽이 비틀어진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듯한-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손이 두 개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왼손으로 배를, 오른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샤워기 아래 물줄기를 맞으며 서있는 사람처럼 쏟아져 내리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온몸으로 맞고 있으니 남자는 처음 집을 보러 왔던 날이 떠올랐다.


“아휴, 지금 밤이라 해가 안 들어와서 그렇지, 이 정도면 아주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야, 거의 남향이나 마찬가지지, 남향!”


거듭해서 거의 남향임을 강조하던 부동산 사장의 말이 떠오르자마자 주변에서 쉽사리 찾기 힘든 그녀의 소프라노급 하이톤 목소리와 새빨간 립스틱을 잔뜩 칠한 얇은 입술도 선명하게 따라 올라왔다. 연신 자신을 힐끗힐끗 흘겨보며 치던 눈웃음에 위아래로 나풀거리던 짙은 속눈썹까지 떠오르자 남자는 그만 기억을 흩어버렸다.


2. 아주 약간 서쪽으로 혹은 남쪽으로 치우친


막상 이사를 와보니 아주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서향의 거실이었다. 향이니 구조니 하는 것들까지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다지 개의치는 않았지만, 이렇게 늦은 오후 방에서 나올 때마다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거실에도 암막커튼을 하나 사서 달아야겠다고 생각을 해보지만, 늘 생각에서 그치고 마는 일들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울렁이는 속과 흔들리는 머리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남자는 양손을 내리고 늦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창을 바라보았다. 눈부셨다. 그렇게 남자는 한참을 아주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서향의 거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상하단 두 개로 이루어진 구형 냉장고 앞으로 걸어온 남자는 아래쪽 냉장실 문을 당겨 열었다. 문이 열리자 냉장실 휑한 내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남자는 안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문이 열리자마자 문쪽 선반에 놓여있던 원통형 플라스틱 병을 집고는 그대로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남자는 우유로 가득 차 있는 투명한 원통 플라스틱병의 뚜껑을 돌려 열고는 병째 들어 올려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 내가 입 대고 마시지 말랬지!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듯 자신의 머릿속을 관통하는 목소리에 남자는 흠칫 놀라며 잠시 병을 입에서 떼었다. 하지만 이내 눈에 힘을 주고는 다시 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병은 빠르게 비어 갔다. 그 속도에 맞추어 남자의 목젖이 연신 꿀렁거렸다. 숨 한 번 쉬지 않고 우유 한통을 다 비운 남자는 빈 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주방 오른쪽 문을 열어 플라스틱이 가득 담겨있는 재활용 가방에 빈 우유통을 던졌다. 문을 닫으려던 남자의 시선에 가방에 가득 담긴 플라스틱 용기들이 다시 들어왔다.


“아... 수요일..”





*이미지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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