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_자멸로 이끄는
남자는 플라스틱이 가득 담긴 커다란 재활용 가방을 들고 아파트 현관문을 나와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분리수거장으로 막 들어서자마자 억척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중년 여성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또 밤새 퍼마셨네. 그러다 몸 다 베려, 지금 젊으니까 잘 모르겠지? 나중에 골병들어 골병!”
마침 분리수거를 막 끝내고 나가려던 아랫집 아주머니가 들어서는 남자를 보자마자 커다란 분리수거용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 양손을 허리에 걸친 채 한바탕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아…네…”
“뭐든 적당히가 좋아, 적당히.”
“아…네…”
“뭐 맨 말만 하면 ’아, 네‘ 야. 아휴 답답해! 저 그 뭐냐, 아파트 수선계획 동의서 받는 거 이번 주까지니까 이따 저기 현관 입구 앞 투표함에 넣고 가.”
“아…네…”
“대답만 하지 말고! 저번처럼 까먹으면 내가 또 올라가서라도 받을 거니까 꼭 챙겨!”
“아…네…”
아.. 조금만 더 있다 올걸..
남자는 뒤늦은 후회를 해보았지만, 이제 와서 뭐 어쩌랴. 그렇게 아랫집 아주머니는 남자가 분리수거를 하는 내내, 그건 위에 뚜껑은 분리하고 넣어야지, 이건 속까지 제대로 안 씻었네, 거기 투명 플라스틱 넣는 곳이야 등등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바라보며 잠시도 쉬지 않고 남자의 분리수거를 진두지휘했다.
갑자기 분리수거장에 적막이 흘렀다.
플라스틱 용기들에 덮여있어 몰랐던, 남자의 대형 재활용 가방 바닥에 깔린 빈 와인병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랫집 아주머니의 눈과 입이 두 배로 커졌다. 그리고 두 배로 커진 아주머니의 입에서 두 배로 잔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에?? 이게 다 몇 병이야! 하나 둘 셋.. 하이고.. 병만 팔아도 금방 부자 되겠어 아주!”
분리수거장의 적막의 시간은 그렇게 반짝 등장했다 두 배의 소란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3. 또다시 머릿속을 관통하는 그녀의 목소리
오늘따라 유독 힘든 분리수거를 끝내고 아파트 1층 입구에 들어선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도 않고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또 누군가를 만날지 몰라 아예 계단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오늘의 외부인은 아랫집 아주머니 한 명으로 족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재활용 가방을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소파로 몸을 던졌다.
- 소파는 앉는 데지 눕는 데가 아니라고 했지!
또다시 남자의 머릿속을 관통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남자는 급히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마치 그렇게 있으면 여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듯 소파의 등받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던 남자가 소파 등받이에서 얼굴을 떼고 다시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주방 바닥에 투명 비닐이 아무렇게나 뜯어진 채로 놓여있던 생수팩에서 한 통을 꺼내 들고는 냄비에 물을 붓기 시작했다. 아래 서랍에서 소금을 꺼내 냄비에 툭 털어 집어넣고, 서랍 밑 수납장에서 파스타면을 꺼내 엄지와 검지를 말아 그 절반 정도가 채워질 정도만 덜어냈다. 꺼낸 파스타면 양끝을 잡고,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덜어낸 파스타면이 반으로 부러졌다.
“봤으면 또 한 소리했겠지. 파스타면을 누가 이렇게 부러뜨려 먹냐고..”
제법 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번엔 냉장고를 열어 뭔가를 꺼냈다. 흰색 스티로폼팩에 찢어진 랩으로 대충 덮여있는 -그래서 랩이 소용이나 있을까 싶은- 원래 있어야 할 양의 절반쯤 남아있는 소고기였다. 파스타를 삶는 냄비 옆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올린 프라이팬이 채 예열되기도 전에 고기를 아무렇게나 올렸다. 앞뒤로 몇 번 뒤집어 대충 핏기가 사라지자 불을 끄고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파스타 면이 담긴 냄비를 집게로 한 번 휘저은 뒤 냄비에 남아있던 물을 싱크대에 절반쯤 따라버렸다. 그대로 냄비를 싱크대에 놓아두고 냉장고에서 파스타 소스를 꺼냈다. 소스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토마토소스병의 뚜껑을 열고 냄비에 남은 물을 마저 다 부었다. 냄비에 다시 불을 올리고 소스병을 열어 면이 담긴 냄비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집게로 면과 소스를 몇 번 뒤적이던 남자가 싱크대 상단 수납장을 열어 아무 무늬가 없는 흰색 그릇을 꺼냈다. 냄비의 불을 끄고 파스타를 그릇에 옮겨 담았다. 아직도 프라이팬에 그대로 올려져 있던 소고기를 집게로 집어 파스타 위에 대충 올리고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후추통을 집어 한참을 갈아댔다. 파스타 위에 올려둔 고기의 윗부분이 갈려진 후추의 검은색으로 거의 다 덮여 갈 때쯤, 그제야 후추병의 그라인더를 돌리던 남자의 손이 멈췄다.
어느덧 해는 거의 지고 있었고 남쪽으로 아주 약간 치우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서향의 거실 바닥엔 약해진 빛이 마치 태양의 꼬리처럼 길게 걸쳐져 있었다. 접시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남자가 뭔가 생각난 듯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현관 옆의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이 열리자 거실에 누워있던 흐릿한 태양의 꼬리가 방 안쪽으로 갈라져 들어가며 거대한 직육면체 형태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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