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유 반병, 파스타면 삼분의 일 그리고 와인 한병

알바_자멸로 이끄는

by 박나비

방문이 열리자 거대한 직육면체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족히 백 병은 넘게 보관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와인냉장고 앞에서 남자가 멈춰 섰다. 손잡이를 당기자 커다란 와인냉장고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거대한 외관과 어울리는 원목 재질의 고급진 나무 선반들이 칸마다 놓여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반들은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 텅 비어있었다. 내외부의 고급스러움과 그 거대한 사이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대여섯 병의 와인만이 초라하게 내부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대여섯 병의 와인들도 대부분 만원을 넘지 않는 싸구려 와인들이었다.


싸구려 와인 대여섯 병을 앞에 두고 남자는 장고에 들어갔다. 도대체 여기서 이렇게까지 고민해서 고를 와인이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잠시 후, 마침내 기나긴 고민을 끝낸 남자가 가운데 놓여있는 병 하나를 꺼내 들고 와인냉장고 문을 닫았다. 다시 거실로 나온 남자는 파스타가 담긴 접시와 와인병을 들고 처음 잠에서 깬 방으로 들어갔다.


와인을 잔에 따르고, 마시고, 비우고.

파스타와 고기를 입에 넣고, 씹고, 삼키고.

다시 잠이 들고, 일어나면, 우유를 마시는.

어찌 보면 꽤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남자의 일상은 관음의 재미가 썩 좋진 않았다.


4. 우유 반 병, 파스타면 삼분의 일 그리고 와인 한 병


- 타타탁탁


외부의 불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지만 방안의 사물들과 그 사물들에 전혀 동화되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윤곽은 뚜렷했다. 남자의 앞에 있는 노트북 화면 때문이었다. 한참 무언가를 검색하고 유심히 모니터를 바라보던 남자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하지만 몸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남자는 바로 다시 일어나 침대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헝클어지고 기름진 머리카락 속에 두 손을 파묻었다.


- 우유가 반 병 남았으려나. 고기는.. 아, 고기는 이제 없지. 파스타면은 삼분의 일쯤 남은 봉지가 다고..


우유와 고기, 파스타면까지 확인이 끝나자 남자의 머릿속에 현관입구 방에 있는 거대한 와인냉장고 내부가 떠올랐다. 거기엔 이제 딱 한 병의 와인만이 남아있었다. 좀 전에 확인한 통장 잔고의 숫자도 떠올랐다. 파스타면 하나도 살 수 없는 세 자리 숫자. 남자는 슬며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구직사이트란 구직사이트는 모조리 들여다보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평범한 회사원 이력의 40대 남자를 찾는 곳은 많지 않았다. 아니, 많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없었다. 조금이라도 해당이 되는 곳들을 찾아서 전화도 해보고 이력서도 보내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월 수익 1,000만 원 보장!]


광고에 혹해 연락을 해보았지만 이미 상할 대로 상한 남자의 현실감각으로도 전화기 너머 상대방의 말은 저 하늘 위 뜬 구름을 잡기만 하면 대박이란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월급 320만 원. 주방보조 구함. 월-일 휴게시간 보장, 근무요일, 시간 협의 가능.]


사람 상대할 일도 없고 주방에서 설거지만 하면 된다는 공고에 혹했지만, 남자는 고용이 어렵다는 한마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연락이 오는 곳들은 죄다 이런 식이었다.


- 위이이이잉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동소리에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윗집 사람이 또 전화기를 방바닥에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 번쯤 울리면 들리지 않던 평소와 달리 네 번, 다섯 번.. 진동은 계속해서 울렸다. 그러고 보니 평소와 달리 진동 소리가 꽤나 가까이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진동 소리의 근원을 찾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검은색 면바지 주머니에서 쉴 새 없이 울리고 있는 전화기를 꺼냈다.


모르는 번호.


잠깐 망설이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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