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한 가지 제안

알바_자멸로 이끄는

by 박나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남자는 밖으로 나와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 유명한 빌딩에 저런 사무실이 있었다니..

좀 전까지 그곳에 있다 나왔음에도 새삼 믿기지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건물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남자에겐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15. 한 가지 제안


돌아가는 길에 남자는 집 근처 대형마트에 들렀다. 몇 가지 사야 할 것들이 있었지만 면접을 본 이후 생각이 많아져서인지 아무것도 고르지 않고 쇼핑카트에 상체를 실은 채 넓은 마트를 빙빙 돌고만 있었다. 낮의 인터뷰를 생각하니 마치 꿈을 꾼 듯했다.


괜찮을까. 뭔가 허술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나 사무실 분위기도 좀 그렇고..

아니지.. 내가 지금 뭘 가릴 처지는 아니지..

이 정도 조건이면 엎드려 빌어서라도 해야 할 판에..

하아.. 그래도 뭔가 찝찝한데..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남자다.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질수록 남자의 시야도 점점 좁아졌다. 남자의 시야에서 마트 안의 풍경이 사라지고,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더니 결국 밀고 있던 카트마저 사라졌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진 남자와 빈 카트 한 대가 넓은 마트를 빙빙 돌고만 있었다.


- 툭


“아니 뭐야! 눈을 제대로 뜨고 다녀야지! 어디 남의 엉덩이에 카트를 갖다..”


몽유병 환자처럼 주변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마트 안을 빙빙 돌고 있던 남자가 그만 앞에 사람을 카트로 치고 말았다.


“아…죄송합니다.”


중년 여성의 날카로운 음성에 카트에서 사람들, 그리고 마트 전체로 다시 시야가 돌아온 남자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뭐야 뭐야~ 여기서 다 만나네 그래! 아휴~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요즘에 내가 우리 아파트 아줌마들하고 그 뭐냐, 라인댄스를 시작했더니 엉덩이가 탄탄해져 가지고 살짝만 건드려도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니까 글쎄. 아이고 내가 참 별소리를 다하네 호호호. 참. 출근은 괜찮았어? 아휴 이렇게 훤칠한데 아무렴~ 그래 뭐 사러 온 거야? 야채나 과일 같은 건 아무래도 남자가 고르긴 어렵지. 어떻게 내가 좀 도와줘?”


숙인 고개를 아직 들지도 못하고 있는 남자의 귀에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남자의 머릿속엔 좀 전까지의 심각한 고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아무래도 다니는 마트를 바꿔야겠다는 생각만이 남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위이이잉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년 여성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 남자에게 구세주가 등장했다. 남자는 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진동이 오고 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의 진동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다니. 남자는 지금 전화를 건 사람이 천지개발이라 하더라도, 아니 악랄한 보이스피싱 전화라 하더라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전화를 받아주리라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아, 저 전화가…”


“아휴 저놈의 전화는 낄 때 안 낄 때 구분도 못하고! 호호 농담이야 농담~ 어서 받아~ 어여 받어 전화 끊어질라.”


무엇이 농담이고 무엇이 진담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중년 여성의 말에 남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동시에 최대한 멀리! 하지만 너무 도망가는 티는 나지 않게 카트를 밀었다.


“여보세요.”


“너무 빨리 다시 연락을 드리네요. 샤크컨설팅 박무한 팀장입니다.”


뭐지, 다음 주까지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었잖아..

혹시 다른 사람을 채용한 걸까.

젠장, 아까 그 자리에서 바로 하겠다고 말을 할껄그랬나..

불길한 생각을 떠올리며 남자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아.. 네.. 어쩐 일로..”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 해서요.”


“제안이라면 어떤...”


“저희 클라이언트 한 분께서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던 컨설팅 일정을 급하게 내일로 변경 요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존 전담 컨설턴트분과 일정 조율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일정이 맞지 않아 대체 컨설턴트를 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사팀장이 잠깐 말을 끊었다.


“아.. 그럼 그 대체컨설턴트를..?”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인사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한 번 시험 삼아 일을 해보시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이 분이 성향이 그렇게 까다롭지 않으시고 컨설턴트에 크게 민감한 스타일도 아니셔서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물론 일 자체도 어렵지 않구요. 그래서 전화드렸습니다. 시험 삼아 한 번 해보시면 다음 주까지 결정하시는데 더 도움이 되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내일 직접 한 번 컨설팅을 해보시는 게.”


“아... 네...”


“대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진행될 겁니다. 이번은 시용 개념이라 페이는 전속 컨설턴트 수임료의 절반인 200만 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고 한 시간 이내로 저에게 다시 콜백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편안한 저녁 보내..”


“하겠습니다.”


인사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 부담감에 바로 결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시간 정도 고민해 보시고..”


“아닙니다. 당장 내일이면 상황이 급하실 텐데.. 그리고 한 번 경험해 보는 게 저에게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장 내일이라 저도 말씀드리기가 조금 난처했었는데… 사실 너무 급하게 일정 변경이 들어와서 대체 컨설턴트를 못 구하면 저라도 들어가야 되나 생각했었습니다.”


“인사팀장님께서 직접 컨설팅에 들어가기도 하시나요?”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나 보군요. 저도 컨설턴트 출신입니다. 이래 봬도 현역땐 꽤 잘 나갔었습니다. 하하. 뭐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지만...”


“아.. 대단하시네요. 컨설턴트 현직에서 스탭조직으로 커리어 변경이 쉽지 않은 선택이셨을 텐데..”


“뭐, 결론적으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아,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네요. 그러면 내일 컨설팅건은 확정으로 내부 보고하겠습니다. 세부 내용은 문자와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급하게 제안드렸는데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사무실로 오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 아닙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남자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너무 바로 답을 했나..

조금 생각을 해본다고 할 걸 그랬나..

하아.. 더 고민하지 말자.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나저나 무슨 컨설팅을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급하게 대타를 찾는 거지..


당장 내일의 일로 다시 생각이 많아진 남자가 무의식적으로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남자의 시야가 다시 좁아지기 직전, 앞쪽 과일 코너에서 과일을 고르고 있는 중년 여성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다시 꺼내더니 울리지도 않은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아, 네 그게 그렇게 되는 거군요. 그러면 그다음은 제가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면 그게 그렇게도 되고...”


남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런 말이나 중얼거리며 천천히 카트의 방향을 틀었다. 카트가 정확히 과일코너와 반대 방향이 되자 움직임을 멈추고 힘차게 카트를 밀고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다급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