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와인에 관한
(이라 쓰고 일상 신변잡기에 관한 수다 및
주변 인물 탐구기라고 읽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친구들과의 대화에
아무 맥락 없이 와인이 끼어드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친구 K가 아이 학습지에 사용하는 펜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책에 가져다 대면 음악과 음성이 나오는
고가의 펜인데 아무래도 잃어버린 것 같다며,
아무리 찾아봐도 당최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펜을 새로 구입하는 비용만 십여만 원인데,
그 돈이면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몇 병은 사줄 수
있는 돈이라며, 절대 새로 살 수 없다 비분강개한다.
온 집안을 뒤엎어서라도 찾아낼 기세다.
참으로 기특한 K다.
그러자 친구 L은
지금은 장성한(내 기준엔 장성이다.)
아들의 어린 시절, 학습지를 처음 시켜보았는데,
그 결과 학습지가 집안 불화의 원인인 것 같아
시작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집에서 퇴출시켰다는
가슴 아픈 가정사를 고백한다.
역시 속전속결의 현명한 L 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친구 J는 얼마 전 학습지 선생님께 메시지를
받았다며 한숨을 푹 내쉰다.
일하느라 아무리 바쁘셔도 아이한테 신경을 좀 더
쓰시면 좋겠다는.
이 말을 하며 J는 분통을 터뜨린다.
물론 교양 있는 현대의 커리어우먼인 J는
자애로운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띄우며 그러겠노라고,
제가 꼭 좀 더 신경 쓰겠노라고 대답했겠지만
말이다.
J의 주말 일과
(거의 새벽부터 두 아이를 데리고 각종 체험학습 및
태권도 심사 대회, 그리고 문화 센터 등록 등 정말
쉴 새 없이 짜여진 일정표다)
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우리는 모두 한 마음이 되어
J를 위로한다.
J, 넌 슈퍼 울트라 메가톤 아니 기가톤급으로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이쯤 되면 이제 K의 탄성이 튀어나온다.
드디어 펜을 찾았노라고.
유레카!
한 마음으로 J를 위로하던 우리는,
다시 한 마음이 되어 이번엔 K를 축하한다.
대화의 분위기만 보고 있으면
마치 망국의 설움을 겪던 백성들이,
광복의 기쁨을 찾은 줄 알리라.
이처럼 위로와 축하가 단톡방 화면을 한가득
떠돌아다니는 와중에 나는 혼자 배시시 웃는다.
K가 펜을 찾았으니,
다음에 와인 한 병 얻어먹을지도 모르겠구나.
김칫국이라고?
이런 김칫국이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면, 비록 와인 한 병을 못 얻어먹을지라도
이는 참으로 고마운 김칫국이다.
(부담가지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
절대 부담 갖지 말길, K )
한 편씩 글이 완성될 때마다 친구들에게 보내 본다.
보내기 전 오탈자는 없는지 맥락이 이상하지는
않은지를 꼼꼼히 서너 번은 더 확인하고 보내지만,
매번 이들에게 새로운 편을 보낼 때면
두근거림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이번 편도 재밌다고 해줄까,
이번은 좀 별로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 그 보다 아예 반응들이 없으면
그건 진짜 최악인데...라는 생각에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확인했노라는 숫자가
하나씩 사라지는데도 그 누구도, 그 어떤 말이라도
한마디 올리지 않을 때면 괜스레 마음이
초조 해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포털의 뉴스를 찾아보기도 하고,
읽던 책을 펼쳐 보기도 하고,
깔아만 놓고 실제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핸드폰 게임을 괜히 실행시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뭘 해보아도 흘끔흘끔 카톡 앱 위에
새로운 숫자가 나타나지는 않는지 곁눈질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처럼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칭찬으로.
또 때로는 날카로운 지적으로.
매일 날 채찍질해 주는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채찍이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가장 편하고
이들과 마시는 와인이 세상 두 번째로 맛있다.
(그래서 첫 번째는…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나이가 추측되는 고급 유우머는 지양하기로 했는데.
이쯤 되면 구제불능이다.
각설하고, 내게 와인이 가장 맛있는 순간은,
언젠가 다른 편에서 얘기하게 될 날이 있을 것 같다.
궁금해도 잠시 참으시길.)
그런 이유로 이렇게 친구들과의 대화 중 이따금
나를 매개로 한 와인 이야기가 끼어들 때마다
마치 고료를 와인으로 받는 기분이 든다.
물론 실제로 받는 건 아니지만,
이건 꽤 근사한 기분이다.
이렇게 5화의 제목이 정해졌다.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 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 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제5화 시작.
제5화. 고료를 와인으로 받고 있습니다.
서두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열심히 정독한 멋진
당신이라면, 실제 고료로 와인을 받고 있다는
의미가 아님을 잘 알고 있겠지만,
서두를 빠뜨리고 본문부터 읽은 게으른 당신이라면!
5화의 제목을 이해하기 위해 서두를 읽고 올 것을
정중히 제안드린다.
(정중하기는 개뿔, 멱살 잡힌 느낌이 드신다면
그건…그냥 당신의 느낌일 뿐,
비폭력,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고품격 와인 스토리,
일상 와인 캠페인입니다.)
와인의 장점은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포용성을 꼽겠다.
소주도 좋고, 맥주도 좋고,
막걸리도 좋고, 위스키도 좋지만
와인 만큼 포용성이 넓은 술은 없는 것 같다.
직관적인 알코올 향 때문에
소주를 못 마시는 이들에게도,
맥주는 배가 불러 싫다는 이들에게도,
먹고 난 뒤가 더 걱정이라
막걸리는 피하게 된다는 이들에게도,
너무 독해 위스키는 힘들다는 이들에게도.
이 모든 이들에게 와인은 훌륭한 대안이 되어 준다.
그리고 와인은 이 모든 이들을 인자하게
자신의 품으로 품어 들인다.
그래서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에 나는 주로 와인을
들고 가는 편이며, 친구들 또한 이를 기꺼이 반긴다.
같은 술을, 같이 즐겁게 마셔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출발하기 전 어떤 와인을 들고 갈지 고민하는 데서
나의 여정은 시작된다.
집에 있는 셀러
(라고 해봤자, 12병이 간신히 들어가는
미니 사이즈에다 콤프레셔 방식이 아닌
반도체 방식이라 한 여름에는 생각날 때마다
설정온도를 들여다보게 하는 빈약한 셀러지만,
나에겐 무척이나 소중한 아이다.
말 나온 김에 셀러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알아 두면
좋은 것들이 있는데…그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설명드리도록 하고, 이쯤에서 이제 그만 괄호를
닫자.) 를 들여다보며, 가져갈만한 와인이 있는지
확인 한 다음, 있으면 그 녀석을 챙기고,
없으면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한다.
백 팩을 둘러메고 집 밖으로 나오면,
자연스레 발길은 지하철역을 향하며
머릿속은 오늘은 어디를 들러 볼 것인지 고민한다.
역으로 가는 길에는 몇 개의 편의점과
한 개의 대형 마트, 한 개의 주류 전문 매장이 있다.
편의점의 월별 프로모션과 추천와인의 내용이
좋을 때에는 편의점을,
마침 대형마트에서 와인 행사를 하고 있으면
당연히 마트를,
주류 전문 매장에서 한 번씩 미친 세일을 할 때면
(우리 동네 주류 전문 매장 출입구에서
‘가격은 주인장과 협의 가능’ 이라 써 놓은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물론 소심한 나는 협의는 하지 못하고,
부르는 데로 가격을 지불했지만, 꽤 횡재한 기분이
드는 가격이었다! 이런 게 미친 세일이다.)
당연히 전문 매장을 이용하게 된다.
주로 두 병을 사게 되는데, 그럴 경우
아는 맛 한 병, 모르는 맛 한 병으로 선택하는 편이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과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
두 가지 맛을 볼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방법이라
스스로 위안하며 영수증의 가격이 눈에 들어오기
전에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곱게 찢어
문화 시민답게 근처 쓰레기통에 살포시 버린다.
당신도 이렇게 현명한 소비를 해보자.
그럼 오늘부터 당신도 스마트 컨슈머!
친구들과 만남의 자리는 늘 떠들썩 요란하며,
중구난방 각기 다른 화제들이 각기 다른 얼굴들을
향해 날아다닌다.
하지만 누구 한 명이 잔을 들면,
모두가 하던 말을 멈추며 다 같이 잔을 든다.
이때만큼은 다들 왜 잔을 드는지,
이 잔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몰라도 반사적으로
조용하다.
올린 잔들이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자아내고,
그 잔들이 각자 주인의 입으로 향한다.
잠시 주인의 입술에 붙어 그들의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고유의 역할이 끝나고 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다음 활기가 채워 지길
다소곳이 기다린다.
이제 다시 주변은 떠들썩해지며,
테이블의 공기는 여러 가지 화제들로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친구들의 얼굴은 한 잔의 와인이 주는 기분 좋은
취기로 붉게 상기되어있고,
지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표정과
가장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나는 내 나름의 사심을 채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내겐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맛있는 와인을 마시는 것도 물론 큰 즐거움이지만,
직장과 육아에 지친 그네들의 얼굴에서
애써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웃음과 표정을
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스트레스 해소법이자
즐거움이다.
와인을 마시기 위해 친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친구들과의 자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와인이 있는 것이다.
본질은 항상 중요하다.
잊지 마시길.
친구들이 다 사라지고 와인만 남은 세상과,
와인이 다 사라지고 친구들만 남은 세상.
어느 쪽이 당신에게 더 고통스럽고 괴로울지
한 번 생각해 보면 될 일이다.
아니, 그렇게 바로 선택하지 말고!
생각을 쫌…하아, 이 사람들 진짜…
* 그래서 오늘 당신이 친구들과의 모임에 가져갈
와인을 하나 추천 드린다면
이 와인 ‘이터(ITER)’ 를 추천드립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카모미 와이너리의 와인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중간 정도의 산미와
모든 이들이 함께 즐기기에 딱 적당한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은 만 원 후반대이니,
모임의 인원이 많다 해도 다음 달 카드 값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데일리로 좋은 와인입니다.
그날의 음식과,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화이트(샤도네이)와 레드(까베르네소비뇽) 중
선택하시면 됩니다. 물론 둘 다 선택하시면
그런 고민은 필요가 없겠습니다.
밧줄과도 같은, 라벨에 그려진 그림은
인생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무수히
많은 경험들을 의미합니다.
라벨의 이미지도 그 와인을 선택하는 요소들 중
하나로 보는 저에겐 이 의미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조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와인입니다.
자주 가는 마트에 이 와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럴 경우 종종 있습니다.)
대안으로 ‘서브미션(submission)’ 추천드립니다. 상시가 2만 원, 행사가 만원 중반대로
비슷한 유형입니다.
물론 둘 다 있다면
저는 ‘이터(ITER)’를 추천드립니다.
좀 더 저렴하니까요.
** 본문에서 언급한 와인의 포용성에 관한 내용은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편협하다 욕하셔도 할 말이…)
모든 주류의 카테고리별 애호가들이 비슷한 이유로
자신들의 주종이 더 좋다고 얘기할 수 있는
내용이니 가볍게 읽고 넘어가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소주, 맥주, 막걸리 다 좋아합니다.
한라토닉도 좋아하고, 테슬라도 좋아합니다.
막사도 좋아하고, 고진감래주도 좋아…
술이 좋아 술술 쓰다 보니 천하의 주정뱅이처럼
보일 것 같아,
오늘도 당신의 즐거운 와인 생활을 기원 드리며
이만 총총.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