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클로바, 클래식 음악 틀어줘.”
언젠가부터 집에서 저녁 메뉴로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은 뭔가 양식의 범주에
들어갈 법한 음식을 먹게 되는 날이면,
자연스레 같이 사는 셋 중에 한 명이 허공에 대고
외치는 말이다.
그러면 음악 어플과 연결되어 있는 AI스피커에서
우아한 클래식 선율이 랜덤으로 흘러나온다.
언제, 왜, 그리고 누가 제일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다.
동거인 셋 중 누구 하나 클래식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는 스피커에서 랜덤으로
재생되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정말 순수하게
음식과 서로의 대화에 집중한다.
그러다 정말 가끔, 가뭄에 콩 나듯,
누가 들어도 ‘아, 이건 어디서 들어봤어.’ 라고
할 법한 곡이 나오면 마치 짠 것 처럼,
‘아, 이 노래 알아. 이거 누구더라, 베토벤인가’
‘아닐껄, 모차르트일껄’
‘아니야, 이거 슈베르트로 알고 있는데’
와 같은 대화가 시작된다.
이때 서로 알고 있는 작곡가란 작곡가는
다 등장하는데 (뭐 그래봐야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
복잡하지도 않다.) 대화의 패턴과 등장하는
작곡가의 순서도 거의 항상 같다.
딱 저 순서다.
저 대화를 이어 이제 바흐나 헨델 처럼
그 다음으로 유명한 작곡가들이
(아, 물론 우리집 기준이다. 죄송합니다!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
등장하지만 정답을 맞추는데 의미가 있는 대화가
아니므로 잠시 그러다 그냥 스리슬쩍
다른 주제로 대화는 넘어간다.
이렇게 스리슬쩍 6화를 시작해본다.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 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 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6화 시작.
제6화. 한 밤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서두에서 ‘사계’를 얘기했더니,
그와 관련된 우리집의 ‘암묵적인 룰’이 하나 더
생각난다. (하아, 아직도 서두를 읽지 않고 본문을
바로 읽는 당신! 이제 말하기도 힘들다. 훠이훠이~)
그날도 우리는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먹기 위해
클래식 음악을 틀고, 다들 흘러 나오는 잘 모르는
선율을 귓등으로 들으며 제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보통 내가 고기를 굽고, 파스타 면을 삶고,
소스를 볶고, 나중에 다 먹으면 설거지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분명 다들 바빠 보였는데…
나만 바쁜 거였다.)
아무튼 그 때였다. 스피커에서 흘러 나온
너무나도 익숙한 곡에 우리 셋 모두 최면에 걸린 듯
동시에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빠밤빰빠바바밤 빠바밤빰빠바밤 빠라밤빠바밤빰빰~”
나는 당신이 좀 전에 뭘 했는지 알고 있다.
빠밤빰빠바바밤~하면서 저 글자들 그대로 읽으며
흥얼거려 보았을테지!
근데 설마 이것만 보고 제목을 맞출 수 있을까.
헉, 정답이다! 비발디 ‘사계’
(역시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은
당신의 수준에 걸맞는 고품격 와인스토리,
여기는 일상와인 캠페인입니다.)
여기서 밥 하다 말고 갑자기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경쾌한 걸 보니 봄이네’
‘무슨 소리냐 여름의 이미지가 딱 떠오르지 않냐’
‘이거 나 학교에서 들어봤는데, 제목이 계절이야?
그럼 나는 가을!’
창피하지만 어쩌랴. 이게 우리집 수준인 것을.
그래서 정답은?
비발디의 ‘사계’ 중 ‘봄’ 1악장.
그후로 우리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곡명을 지칭해서
클래식을 틀게 되었고, ‘사계’의 나머지 악장들도
들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취향이 까탈스러운 우리가족에게
비발디 ‘사계’의 모든 악장들이 받아 들여진 것은
아니다.
‘봄’ 1악장, ‘가을’ 3악장, ‘겨울’ 2악장.
까다로운 취향의 우리 가족에게 받아 들여진
축복 받은 세 악장이다.
(사실, 쓰면서도 부끄럽다. 왜 부끄럽냐고?
저 세 악장을 한 번 들어 보시길…)
하루는 AI스피커에 ‘비발디의 사계 틀어줘’ 라고
말한다는 걸 그냥 ‘사계 틀어줘’ 라고 했더니…
그날부터 우리 가족은 태연의 팬이 되었다.
사계절이 와 그리고 또 떠나
내 겨울을 주고 또 여름도 주었던
온 세상이던 널 보낼래 정말 너를 사랑했을까?
아, 그래서 우리 가족의 암묵적인 룰이 뭐냐면,
비발디의 사계를 듣기 전 무조건 태연의 사계를
먼저 한 번 듣는 것이다.
뭔가 말도 안되는 이상한 전개 같겠지만,
뭐 어쩌랴. 우리네 인생이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클래식은 와인과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다. 한 번 들어선 잘 모르고 여러 번
들어도 잘 모르겠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는 곡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모르는 곡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가져와도 모자랄 만큼 많다는 것도 그렇다.
유명한 작곡가의 대표곡 만큼이나 그 작곡가의
덜 알려진 곡이 많다는 점도 와이너리와 와인의
관계처럼 비슷하다.
지난 5화에서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와인이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마시는 와인이라고
알려드렸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하아,
5화를 다시 한 번 정독 하도록 하자.
한 편 한 편이 내 피, 땀, 눈물의 결정체…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번 이런 식이면 좀…속상하다.)
그럼 세상에서 첫 번째로 맛있는 와인은?
모두가(내 기준엔 동거인 2명) 잠든 깊은 밤,
혼자 사부작 거리며 앉아서
잔잔한 클래식을 틀어 놓고
좋아하는 와인에
좋아하는 음식을 곁들여 먹으며
즐겨 읽는 책을 대충 보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며,
이때 먹는 와인이 가장 맛있다.
즐겨 읽는 책은 하도 많이 읽어서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내용을 다 알기에
말 그대로 대충만 읽어도 좋다.
책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다는 그 행위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 조용히 끝나갈 때면
거의 마지막으로 항상 듣는 곡이 있다.
공개하자니 조금 부끄럽지만,
당신과 나만 알고 있기로…
브람스의 자장가…라고 하면 좀 많이 부끄러우니까
요하네스 브람스가 1868년 완성한 5개의 가곡 중
네 번째 곡이라고 하자. 제발.
어린 시절 모두가 한 번쯤은, 아니 수십 수백번은
들어 봤을 이 곡이 나의 만찬에 피날레를 장식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날도 고단했던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감하고,
동거인들도 모두 잠이 든 걸 확인 한 뒤
나는 혼자만의 만찬을 준비했다.
거의 두 시간에 걸친 만찬 동안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두 눈엔 익숙한 책의 활자를 담아 냈고,
코와 입으론 준비한 와인과 음식을 음미했다.
꽤나 만족스러운 만찬이었다.
여느 날처럼 정리를 하고 침대에 누우려다
묘한 기분이 들어 다시 의자에 잠시 앉았다.
허전했다.
그냥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모두가 잠이 든 이 깊은 밤,
나는 이미 한 병의 와인과 한 접시의 음식을
비웠는데, 왜 허전한걸까.
이 시간에 무얼 더 할 수 있다고 이러는 건지.
나는 이제 잠이 들어야 되는데,
잠에서 깬 아침엔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는데. 지금 이러면 안되는데...
핸드폰의 음악 어플을 다시 실행해
자장가를 검색해 본다.
화면에 주루룩 나오는 수 많은 자장가들 속에서
‘브람스’ 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그렇게 그날 나에겐 ‘혼자만의 만찬’에 피날레가
생겼고,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자장가가 생겼다.
* 홀로 즐기는 한 밤의 만찬 때 가끔 마시는
와인입니다.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고 싶은 당신을
위해 소개드립니다.
(사실 이 시간이면 어떤 와인이라도 좋습니다.
늘 이런식이라구요? 맨날 다 좋다구요?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진짜 다! 좋다니까요?)
평소 특정해서 먹을 기회가 잘 없는
포르투갈 와인으로 '실크앤스파이스' 입니다.
실크와 스파이스라니,
뭔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의 조합이지만,
이게 또 의외로 색다른 풍미를 전해줍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실키함이 당신을 이 밤과 동화시켜 주지만,
첫 한 모금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은은한
스파이시함이 당신을 혼자 이 밤에 깨어 있게
합니다.
라벨의 지도 이미지는 15세기 바스코다가마의
항해 루트를 모티프로 삼았다고 합니다.
오늘 밤 당신만의 항해를
‘실크앤스파이스’로 즐겨보시길.
상시가 2만원 중후반~3만원, 할인가 2만원
초중반대로 구매할 수 있는 와인입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날을 위해
미리 한 병 준비해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도 당신의 즐거운 와인 생활을 기원드리며
,이만 총총.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