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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Mar 01. 2024

삼거리슈퍼마켙

재벌집 막내아들 못지않은 슈퍼집 둘째 아들

사거리의 정중앙 코너에 위치한 슈퍼마켓의 이름은

<삼거리슈퍼마켙>이었다.


대체 왜 사거리의 정중앙에 위치한 슈퍼마켓의

이름이 <삼거리슈퍼마켙>인지에 대해서는

슈퍼가 개업하고도 한동안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

꽤 논란이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나

중년의 아주머니들은 백이면 백

물건을 계산할 때 돈과 저 질문을 함께 건넸다.


하지만 손님들이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 갈 확률은 반반이었다.

슈퍼의 주인이 두 명이었기 때문이다.


30대 중반의 남자 주인은 어느 누가 저 질문을

하여도 겸연쩍은 듯 씨익 웃으며 손님이 골라온

물건들을 검정 비닐 봉지에  차곡차곡 담을 뿐

왜 사거리 코너에 위치한 슈퍼마켓 이름이

<삼거리슈퍼마켙>인지에 대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합이 얼마인지 계산이 끝나고 나면

검정 비닐 봉지를 손님 손에 넘겨주며

‘허허 칠천삼백오십 원입니다’라는 식으로

손님이 계산해야 할 금액만을 친절하게 말해줄

뿐이었다.


반면 30대 초반의 여자 주인이 있을 때

같은 질문을 던진 운 좋은 손님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듣고 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에이 뭐 별거 아니었네’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많이 파세요’ 류의 인사를 남기고 슈퍼문을 나섰다.


이쯤 되면 왜 사거리 중앙에 위치한 슈퍼마켓의

이름이 <삼거리슈퍼마켙>인지 당신도 궁금할 텐데.


자, 눈을 감아 보자.

눈을 감고 시간을 돌려 90년대 초반으로 가보자.


어느 도시에서든 볼 수 있을 법한 90년대 초반의

정겨운 동네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낯익은 좁은 골목길, 비슷비슷한 모양의 주택들,

마당이 슬쩍 보일 정도로 낮은 담장들...

커다란 감나무의 줄기가 그 담장 밖으로 쑤욱

나와 있는 집도 보인다.


좁은 주택가 골목을 벗어나면 그제서야 차가 다니는

좀 더 넓은 길이 나온다.

길의 양옆으론 각양각색의 가게들이 늘어서있다.

빨갛게 먹음직스러운 국물 떡볶이와

그 국물에 찍어 먹으면 기가 막힌 모둠 튀김들,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어묵꼬치와

물떡꼬치를 한가득 펼쳐 놓은 분식집을 지나고,

‘마이클런스투락‘의 노래가 가게 앞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레코드 집을 지나,

초중고 문제집과 소설, 수필, 잡지 등 각종 책들이

책장에 잔뜩 꽂혀있는 서점이 보이면.


자 이제 하늘 위로 올라가 동네를 내려다보자.

사거리가 보이는지?

그래, 거기! 거기가 맞다.

그 사거리의 중앙 모퉁이를 보면

하얀색 이층 건물이 보인다.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삼거리슈퍼마켙'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간판을

확인하고 슈퍼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어서 오세요~'라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는

여자 주인이 보인다면 드디어 당신도

왜 사거리 코너에 위치한 슈퍼마켓 이름이

<삼거리슈퍼마켙>인지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겠다.


하지만 무뚝뚝한 남자 주인이 보인다면...

자, 다시 한번 사거리의 중앙 모퉁이를 상상해 보자.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당신의 귀에

30대 초반의 아리따운 여성의 밝고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던 당신은 이내 찾으려는

물건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음료수 매대 쪽이다.

오늘 어디 인사라도 가는 모양인지

커다란 1.5리터 델몬트 오렌지주스 두 병이 들어

있는 주스 박스를 들고 와 계산대에 내려두고

지갑을 꺼내는 당신이다.


여자 주인은 계산대에 놓여 있던 면장갑으로

주스가 들어 있는 종이 박스 위의 먼지를 빠르지만

꼼꼼하게 닦아 내고는 당신에게 주스 선물 세트의

가격이 얼마인지 말해준다.

그리고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낸 당신은

지폐와 예의 그 질문을 함께 묶어 여자 주인에게

건넨다.


"아니 근데 가게 이름이 왜 삼거리 슈퍼예요?

오다 보니 여기 사거리던데.."


건네 받은 지폐를 돈통에 넣고 거스름돈을 꺼내던

여자 주인이 활짝 웃으며 답을 한다.


"그게... 우리 아저씨 고향이 삼거리라서요.

김천에 가면 동네 이름이 삼거리라는 곳이 있어요."


여자 주인의 대답을 들은 당신은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뭐 별 이유는 아니었네' 하는 표정과 함께

내어놓고는 곧이어 여자 주인이 내어 주는 잔돈과

델몬트 박스를 들고 슈퍼문을 나선다.


"많이 파세요~"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당신이 완전히 슈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여자 주인은 마치 앞니 하나가 빠진 것처럼

맨 앞 한 칸이 비어있는 음료수 매대를 향해

걸어가더니 선물용 주스 박스들을 앞으로 한 칸씩

분주히 옮기기 시작한다.



오후가 되자,

3~4학년쯤으로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슈퍼로 뛰어 들어온다. 학교에서부터 뛰어 왔는지

코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있고 입에서는 연신

헥헥 소리가 이어진다.


슈퍼로 들이닥친 아이는 너무나 익숙한 듯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과자 코너로 돌진한다.

과자 코너 앞에 도착한 아이는 아래에서 두 번째

칸에 놓여 있는 과자를 하나 잽싸게 집어 들더니

다시 슈퍼 출입문으로 뛰어간다.


"학교 갔다 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문을 나가려다 여자에게 목덜미를 잡힌 아이가

씨익 웃으며 그제야 입을 연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올라가서 과자 먹으면서 숙제부터 하고 있어.

아빠 내려오시라 하고."


여자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목을 한껏 움츠려

목덜미를 잡고 있는 여자의 손을 떼어낸 아이는

주인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는 강아지처럼

다시 목덜미를 잡으려는 여자를 피해

슈퍼 안을 요리조리 뛰어다닌다.


이내 출입문을 열고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남편이 내려올 테고

그럼 여자는 2층의 집으로 올라가 아이가 숙제를

하고 있는지 확인할 참이다.


물론 여자는 올라 가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거실 한켠에 내동댕이쳐진 가방과

소파 한쪽에서 기묘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슈퍼집 아들이 되면 좋은 점이 많다.


2층에서 누나랑 놀다가 심심하거나 출출해지면

가위바위보를 한다. 때론 책을 펼쳐 누가 펼친

페이지에 사람이 더 많이 나오는지로 승부를

가르기도 한다.

이 내기는 누가 돈을 낼지,

누가 과자 살 돈을 달라고 엄마 아빠에게 말을 할지

따위의 슬프고 어려운 내기가 아니다.  

진 사람이 아래층 슈퍼에 내려가서

과자와 음료수를 가져오면 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쉬운 내기다.


이렇다 보니 슈퍼집 아들은

과자, 음료수, 아이스크림의 가격을 잘 모른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가져다 먹으면 되니

가격을 알 필요가 없다. 아니 가격을 알기도 힘들다.


저녁이 되면 삼거리가 고향인 아빠와

<삼거리슈퍼마켙>앞에서(슈퍼앞이 곧 집 앞이다.)

배드민턴을 친다.

셔틀콕이 한참 이쪽저쪽을 오가다 보면

슈퍼집 아들의 콧잔등에는 낮에 학교에서

뛰어 올 때처럼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콧등의 땀을 손등으로 쓰윽 닦은 슈퍼집 아들은

라켓을 던지듯 슈퍼 앞 평상에 내려놓고

개선장군처럼 슈퍼로 들어간다.

좋아하는 오렌지맛 환타를 음료 냉장고에서 꺼내

익숙한 듯 냉장고에 붙어있는 병따개로 한번에

뚜껑을 따서 밖으로 가져 나온다.

차가운 병에 이슬이 맺힌다.

손바닥에 얼음을 쥐고 있는 기분이다.

그대로 들어 올려 병째 꿀꺽꿀꺽 마신다.

시원하고 따끔하다.

두 세번쯤 더 시원하고 따끔한 감각을 느끼고는

어디서 본건 있어서 남은 음료를 머리에 부었다가

환타가 뚝뚝 떨어지는 끈적한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채 엄마에게 끌려간다.


슈퍼집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자는 치토스다.

물론 맛있는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치토스에 들어있던 스크래치 카드가

과자의 맛 만큼이나 그 과자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불투명한 흰 겉봉투를 뜯어 내면 동그란 은박으로

내용이 감춰진 네모난 카드가 나온다.

책상 한 구석에 늘 놓여있는 100원짜리 동전으로

신중하게 긁어 본다.

‘꽝! 다음기회에..‘ 가 걸리더라도 그냥 아래층

슈퍼에 내려가 몇 봉지고 더 먹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렇게 긁고 또 긁어 기어이 '당첨! 한 봉지 더‘를

뽑은 날! 슈퍼집 아들은 한껏 의기양양해져 아래층

슈퍼로 내려가 당첨카드와 새 치토스 한 봉지를

정중하게 교환해 온다.

이때 만큼은 슈퍼집 둘째아들이 아니라

당당한 손님 행세다.


슈퍼집 아들은 반장을 도맡아 했다.

반장이나 부반장이 되면

학기 초 학급 미화 명목으로 교실에 화분을 갖다

놓는 게 당시의 불문율이었다.

학기 초 화분을 가져다 놓을 때는 부모님들이

도와주셔서 별 문제가 없지만 학기가 끝나고

선생님이 화분을 다시 가져가라고 하시면 사실

그때가 큰 문제다.

커다란 화분을 혼자서 들고 가기란 초등학생에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퍼집 아들은 이때도 전혀 걱정이 없다.

함께 화분을 슈퍼까지만 옮겨주면

슈퍼집 아들의 아리따운 엄마나 근육질의 아빠가

먹고 싶은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잔뜩 챙겨 주시니

이 날이 되면 오히려 서로 도와준다고 난리다.


그렇게 재벌집 막내아들 못지않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슈퍼집 둘째 아들은 시간이 지나

어느새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  <삼거리슈퍼마켙>이 있던 사거리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삼거리슈퍼마켙>과

슈퍼가 있던 사거리는 슈퍼집 둘째 아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이제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시간을 되돌려 보자.

당신의 기억 속 어딘가 잠자고 있던,

잊고 있던 동네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 안에는 슈퍼집 둘째 아들도 있고,

약국집 첫째 딸도 있고,

카센타집 셋째 아들도 있다.

문방구집 둘째 딸도 있고,

빵집 외동아들도 있고,

꽃집 막내딸도 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아버지의 손에 들린

종합과자선물세트에 환호하는 내가 있고,

땀에 절은 작업복을 걸친 아버지의 손에 들린

로보트 장난감에 달려나가는 내가 있고,

'수'보다 '미'나 '양'이 많은 성적표를 앞에 두고

무릎 끓은 채 혼이 나고 있는 내가 있다.

 

장난감 몇 개를 놓고 형제, 자매와 투닥거리는

내가 있고,

찌개와 밑반찬 몇 가지가 놓인 상에 둘러 앉아

가족들과 도란도란 밥을 먹으며 신나게 밥숟가락을

휘두르는 내가 있다.


가만히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말없이 그 아이를 꼬옥 한 번 안아주자.

앞으로도 너는 너의 삶을 너무도 훌륭히

잘 살아 나갈 거라고 조용히 다독여주자.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던

피천득님처럼,

나 역시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내 안의 몇몇 사람들을 끔찍이 사랑하며

아주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그리고 내 딸아이가 크면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삼거리슈퍼마켙>이 있던 그 사거리를

같이 손을 잡고 걸어보고 싶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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