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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Mar 29. 2024

10살의 보디가드

38살의 사장님과 10살의 보디가드

9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커다란 장난감 비행기.

동네 아이들과 고무 따먹기를 해서 모은

100개가 훌쩍 넘는 고무 인형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각양각색으로 다른

수십 대의 장난감 자동차들.

물에 띄우면 퐁퐁퐁 항해하는 장난감 배와

용돈이 생기면 달려가 사모았던

문방구표 프라모델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앞부분에 커다란 드릴이 달려 있는,

가장 아끼던 드릴 로봇까지.

모조리 박스에 담았다.


커다란 종이 박스 하나가 장난감으로 가득 찼다.

박스를 두고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그만 가야지 하면서도

두 손이 박스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드릴로봇 하나는 뺄까...’



"괜찮겠어 진짜? 이거 다 줘도?"

누가 봐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절절한

내 표정을 보며 몇 번을 계속해서 물어보는 엄마다.


"응! 괜찮아!"

대답이 조금 늦긴 했지만,

계속 만지작 거리고 있던 드릴 로봇을

박스에 내려놓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조금 아쉽고, 조금 후회도 되지만

나는 이제 변신 로봇과 미니카 따위를 가지고 노는

철부지 꼬맹이가 아니다.

굿바이 내 장난감들.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남자답게 돌아섰다.


하지만 종이 박스를 들고나가는 엄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그런 엄마의 표정을 보며 나는 내가

이제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어제와 별 다를 게 없는 밤인데,

오늘 밤은 뭔가 다르다.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10살의 내가 이런 대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그다지 어른스러운 이유는 아니었다.



몇 달 전부터 BB탄 총이 너무 갖고 싶었다.

BB탄 총 중에서도 한 손에 착 감기는 권총을,

권총 중에서도 베레타가 너무 갖고 싶었다.

얼마 전 친구가 으스대며 자랑하는 모습을 본 뒤로

베레타 권총을 갖고 싶은 마음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아직 갖고 놀기엔 너무 위험하다는

엄마, 아빠의 말에 거의 포기하고 있던 그때.

BB탄 총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그냥 BB탄총도 아니고 그 베레타 권총이!


물론 가지고 놀기 위해선,

사격은 무조건 집에서 표적지에만 할 것.

사람을 향해 쏘면 무조건 압수.

등등의 단서들이 붙긴했지만,

그런 조건들이야 자동반사로 고개만 끄덕거릴 뿐

지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건 이탈리아 명품 베레타 권총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는 거다.


조심스레 탄창을 빼서, 하얗고 동그란 BB탄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채워본다.

스프링이 압축되며 무려 스무 발이 넘는 BB탄이

들어간다.

BB탄으로 가득 채워진 탄창을 다시 총에 결합해서

들어보니 제법 묵직한 느낌이다.

총알이 들어있는 권총이 내 손에 들려 있다니!

설레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한 기분이다.


두 손으로 천천히 권총의 손잡이를 잡아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코흘리개 어린 꼬마는 이 날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고독한 황야의 무법자로,

아니 무법자들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보안관으로,

아니, 사방에서 덤벼드는 악당들에게서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는 보디가드로.

그렇게 그날 꼬마는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이 베레타 권총만 있으면 돼!"

"다른 장난감들은 이제 다 필요 없어!"


아끼던 장난감들을 몽땅 내어놓은 이유다.

그리고 장난감으로 가득 찬 그 박스는 근처에 사는

사촌동생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는 머리맡에 이렇게

베레타 권총이 있으니 말이다.

 


삼거리슈퍼마켙 사장님인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매상이 있는 시장으로

물건을 떼러 가셨다.

건어물, 견과류, 계란 등등..

도매상에서 떼와서 파는 물건들이 있었다.


시장에 물건을 떼러 갈 때면

아빠는 하얀 봉고차를 운전했다.

기아에서 나온 베스타라는 모델이었는데

시장에 물건을 떼러 갈 때도 좋고,

온 가족이 놀러 다니기에도 그만이었다.

대전 엑스포가 개막했을 때는 우리 식구에다

고모네 식구와 두 명의 삼촌들까지 모두

이 봉고차를 타고 꿈돌이를 보고 오기도 했다.


베레타 권총을 가진 그 주 토요일,

나는 흰 봉고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다.

주말에 물건을 떼러 갈 때면

아빠는 나를 조수석에 태워 가곤 했다.

그렇게 아빠와 시장에 가는 날은

나름 재미가 좋았다.


당신 소유의 봉고차 안에 아들과 단 둘이 있다는

상황이 주는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이 동네로 이사 온 처음 몇 달간 말을 할 줄 모르는

남자 사장님으로 오해를 살 정도로

과묵하기로 소문난 아빠가

이때만큼은 참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하지만 오늘은 아빠의 그 어떤 말도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내 표정은 사뭇 비장했고,

내 등은 평소처럼 등받이에 붙어있지도 않은 채

초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조수석 도어 손잡이에

검은색 권총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오늘 나는 삼거리슈퍼마켙 사장님의

비밀 보디가드다.

갑자기 끼어드는 저 까만 차가 수상하다.

자동으로 오른손이 문손잡이에 놓인 권총을

잡으려다 다시 옆차선으로 넘어가는 까만 차를 보며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저 빨간 차도 좀 수상한데?

갑자기 저 차가 우리 차 앞을 막으며 멈출 경우

어떡하지.

음.. 바로 권총을 집고 문을 열어 방패처럼

몸을 숨긴 뒤 세 발쯤 위협사격을 하자.

그리고 운전석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겁에 질린 아빠 사장님을 호위하며

저기 반대쪽 골목으로 들어가야겠다.


이렇게 모든 경우의 수를 살피며

위험 요소를 분석하느라

오늘은 도저히 아빠 사장님의 말을 듣고있을

여유가 없다.


“…그러니까 저 기념비에 한자는 뭐라고 쓰여있는

걸까?”


당신을 철통같이 보호하느라 숨 쉬는 것도 바쁜

열 살의 보디가드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던

사장님이다.

저 앞의 말들은 하나도 못 들었지만

마지막 사장님의 질문이 귀에 훅 들어온다.


사장님의 손가락을 따라 창밖을 보니

도로가에 커다란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거기엔 다섯 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아, 보디가드는 총만 잘 쏘고 보호 대상만 제대로

지키면 되는 거 아닌가요?‘ 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문무를 겸비한 최고의 보디가드가 되고 싶은 욕심에

권총에서 손을 떼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본다.


너무 다행이다.

다섯 개의 한자 중에 아는 글자가 하나 보인다.

두 번째 한자. 불 화(火) 자다.


‘O화OOO’


다섯 자 중에 무려 네 글자를 모르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삼거리슈퍼마켙 사장님의 성격상

내가 전혀 모르는 말을 퀴즈로 내진 않았을 테니까.


아!! 그렇지. 그래! 그거네.

역시 난 문무를 겸비한 최고의 보디가드다.


아빠와 아들이 함께 시장을 가는 차 안.

늘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상황.

다섯 자의 한자가 새겨진 기념비.

두 번째 한자는 그 유명한 불 화(火) 자.


“가화만사성! 맞지? 내가 어떻게 알았게? 크크크

두 번째가 불 화자잖아.

가정에 불화가 없으면 다 잘된다는 뜻인 거잖아!

어때? 맞지? “


명탐정 홈즈도, 괴도 루팡도 울고 갈

완벽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논리적인 추리로

사장님의 문제를 단번에 맞힌 열 살의 보디가드는

이어질 사장님의 칭찬을 기대하며 한껏 고무되었다.


“푸하하하”


어라?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데?

뭐지?

왜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쿠하하하”

운전대를 꽈악 움켜 잡고 이제 아예 목을 뒤로 젖혀

웃음을 터뜨리는 사장님이다.


그 순간,

문무를 겸비한 보디가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는 열 살 꼬맹이만 남아 있다.


“아이고 푸헐, 나비야.

저 글자는 ‘성화봉송로’라고 하는 거야.

여기가 88 올림픽 때 성화를 옮기던 길이어서

그거 기념하려고 세운 비석이야 쿠하하하“


열 살의 내가 유일하게 읽은 불 화(火) 자는

말 그대로 불이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이 목을 지나 코까지 차오르려고 할 때

아빠의 추가 설명이 이어진다.


“가화만사성의 '화'자는 화목하다 할 때 '화'자야.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다 잘 된다는

그런 뜻인 거지.”


흰색 베스타 봉고차의 조수석이 이렇게 불편했던가.

저, 오늘은 컨디션이 좀 안 좋은데 시장은 사장님

혼자 다녀오시면 안 될까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꾸역꾸역 삼키며

성화봉송로를 지난다.


베레타 권총만 있으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고작 한자 다섯 자에 막히다니. 분하다.

한 상자 가득 담아 사촌동생에게 넘긴 장난감이

갑자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허탈한 마음에 차문 손잡이에 있는 베레타 권총을

다리 위로 가져와 만지작 거려본다.


아! 그래도 아직 내겐 할 일이 남아있다.

출발하기 전 마음속으로 작성한

가상의 시나리오에서 마지막 위기의 순간이 있지!


시장에서 물건 가격을 흥정하다 가게 주인과

싸움이 벌어지면 그땐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이 베레타 권총이면 사장님을 지킬 수 있고,

덤으로 물건 가격까지 원하는 가격으로

흥정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훗. 그때 되면 아빠 사장님도 나를 다시 보겠지.

네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구나.

넌 최고의 보디가드야!라고...


그렇게 흐뭇한 상상을 하며

흰색 베스타 봉고차는 잘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든다.


아니 근데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거랑

가정에 불화가 없으면 다 잘된다랑 뭐가 달라?

그럼 가화만사성의 '화'자는 불화(火) 자여도

되는 거 아닌가!


“아빠~~!! 아니 근데!!"


그날 삼거리 슈퍼마켙 사장님은 참 많이 웃으셨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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