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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Apr 03. 2024

<父子有親>

아빠와 아들이 친하면 칼로 서로를 내려칩니다.

키가 작고 왜소한 편이었다.

지금 이 얘길 하면 다들 믿지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 나는 여리고 가냘픈 미소년이었..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중학교1학년 말부터 키가 부쩍 컸고

고등학교 때 180이 넘어 지금은 어딜 가도,


키가 꽤 크시네요,

체격이 좋으시네요,

군대는 헌병 나오셨죠,

류의 말들을 거의 디폴트로 듣긴 하지만

초등학교 당시 나는 그랬다.


이런 여리고 약한 아들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아빠는 내가 중학교에 올라가자 동네 유도장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내내 유도를 배웠다.

젊은 시절 유도를 배웠던 아빠가 생각하기에

여리디 여린 조막만 한 미소년 꼬마아이가

강인한 남자로 다시 태어나기엔 유도가 가장

적합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거의 3년을 낙법부터 시작해서

업어치기, 허리후리기, 허벅다리후리기… 같은

기술들을 배웠더니 어느새 허리에 벨트는

검은색으로 바뀌어있었고

유도협회에서 보증하는 단증도 갖게 되었다.


내 얼굴과 온몸에서 흐르는 땀이

상대방의 얼굴과 온몸에서 흐르는 땀과 범벅이 되어

지금 내 얼굴에 흐르는 땀이 누구의 땀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면 매일 연습한 기술만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상대가 왼손으로 내 오른 옷깃을 잡아채려 하면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옷깃을 잡지 못하게 막고

왼손으로 상대의 오른손 소매를 잡아채고 가볍게

왼 발로 상대의 오른 발목을 툭툭 건드려 본다.


초반 탐색전이 끝날 때쯤,

갑자기 오른팔에 힘을 주고 상대를 끌어당긴다.

놀란 상대가 힘을 주고 무게 중심을 뒤로 보낸다.


이때다.

당기는 오른손에 힘을 풀고 반대로 밀어낸다.

당황한 상대가 다시 내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다.


진짜는 지금이다.

상대의 뒷목을 잡고 있는 오른손에 백이십 프로

힘을 바짝 주어 내쪽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오른 허리를 상대 오른쪽으로 돌리며

오른발로 상대의 허벅지를 차 올릴 수 있을 만큼

강하게 차 올린다.


분분한 낙화.

날아갈 때가 언제인가를

절대 모르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합 내내

격정을 인내한

나의 한판이 허공에 떠있다.


공중에 한껏 떠올랐다 정점을 찍고

메트 위로 떨어지며 멋들어지게 측방 낙법을

구사하는 상대다.


"한판!"


심판을 보던 관장님의 호쾌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제야 시합장 외부로 귀가 뚫리고 눈이 트인다.

뇌가 재부팅되며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짜릿해.

늘 새로워.

역시, 한판이 최고야.



중학교 3학년 말쯤, 이제 유도장의 터줏대감이

되어 널널하게 놀며 운동하고 있으니

그 꼴을 보기 못마땅하셨는지

당신이 이미 몇 년째 운동을 하고 있던 검도장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그날 이후 나의 아침은 아빠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침 5시 30분이면 말없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흔드는 아빠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떴다.

도복과 수건이 들어있는 긴 스포츠백을 매고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아빠와 집을 나섰다.


땅바닥만 바라보며 터덜터덜 걷다 도장에 도착하면

관장님과 사범님께 인사를 하고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는다.

짙은 남색 도복을 입고 도장 중앙으로 나오면

이른 아침의 싸늘한 공기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도장 마룻바닥의 한기가 맨발의 발바닥을 뚫고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기분이다.


처음 한 두 달은 기본자세를 배운다.

죽도를 쥐는 법,

왼손과 오른손에 힘을 배분하는 법,

죽도를 내려치는 법,

머리와 손목 허리를 정확히 타격하는 법.

그러다 나무와 타이어로 만들어진 타격대를

또박또박 정직한 자세로 치기 시작하고

그러다 조금 지나면 뛰어다니며 타격대의 각 부분을

훑고 다닌다.


어느 정도 기초가 갖추어지면 호구를 맞춘다.

사이즈에 맞는 호구를 주문하고 난 뒤 며칠간은

설레어 잠도 잘 오지 않는다.


호구는 머리에 쓰는 호면과

손과 손목을 감싸는 호완,

가슴과 배를 보호하는 갑,

허리에 두르는 갑상으로 구성된다.


자신만의 호구가 생기면 드디어 시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첫 시합 상대는...


아빠다.


하아, 이겨도 몹쓸 자식 같고

지면,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안 좋을 것 같다.


어떠하지.

마음속으로 치열한 고민이 시작되고 있는데

그에 맞춰 시합도 시작된다.


시작을 알리는 기합과 함께,

나는 모아이 석상처럼 도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다. 뭔가 지나간 것 같은데..


외부에서 몸을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린다.


뭐지? 뭐였지?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지?

내 몸을 흔들며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지?


"나비야! 정신 차려야지!"


아...

이제야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나는 시합 중이었고,

시합의 상대는 아빠였고,

이길지, 져줄지 고민하며 죽도를 맞대고

시합이 시작되었지.

호면 너머로 아빠의 씨익 웃는 얼굴이 보였던 것도

같다.


그리고 아빠의 미소를 본 그 순간,

번개같이 머리 위로 날아오던 아빠의 죽도가

생각이 난다.

아니 느꼈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에 퓨즈가 나갔다.


머리에 죽도가 내려치자마자 나는

하반신이 땅속으로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나는 우두커니 선채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


아빠는 166cm다.

내 키는 180cm가 넘는다.


점프를 해서 머리를 내리치셨나?

아니, 근데 내가 호구를 다 안 찼던가?

충격이 이 정도일 수가 있나?

괜스레 손을 들어 머리를 만져본다.

윗머리와 옆머리를 모두 감싸고 있는

단단한 호면이 느껴진다.


우씨...

이길지 져줄지 고민하고 있는데 기습공격을 하다니.

방심했다.

그래 방심해서 그랬던 거다.

이제 선택은 없다.

그냥 박살을 내버려야지.


시합이 다시 시작되었다.



검도장 샤워실의 샤워기에선 찬물만 나왔다.

하지만 전혀 차갑다는 느낌이 없었다.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하염없이 맞고 있다.


나는 입양한 아들일까.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손목을 보호하는 호완과 도복 사이 드러나는

맨살만 내려치는 건 절대로 우연일 수가 없다.

아직 찌르기를 배우지도 않은 초보자를 상대로

목 찌르기를 시도하는 사람이 친부일리가 없다.


그래 나는 친아들이 아닌 거야.

그렇게 나는 혈연을 부정하며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하염없이 맞고 있었다.


갑자기 옆에서 손이 하나 불쑥 들어온다.

슬쩍 내려 보니 두툼한 손에 비누가 하나 들려있다.

말없이 비누를 넘겨받아,

내민 손 주인의 등에 비누칠을 한다.


아빠는 166cm다.

근데 등이 왜 이리 넓은 거지.

등에 비누칠을 한참을 했는데 아직도 빈 곳이

남아있다.


그렇게 한참을 아빠의 등에 비누칠을 하고

다시 비누를 돌려드렸다.

그리고 뚜드려 맞은 똥개 비련의 주인공처럼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하염없이 맞고 있는데,

두꺼운 손이 내 양팔을 잡더니 옆으로 내 몸을

돌려세운다.

이내 등에 부드러운 비누 감촉이 느껴진다.


내키는 180cm가 넘는다.

근데 내 등은 왜 이리 좁은 거야.

두툼한 손가락의 느낌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 끝나고 등이 시리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샤워를 끝내고,

같이 옷을 갈아입고,

온 길을 반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동은 텄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주위를 스쳐간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교복과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다.


등교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이다.


아니, 다른 부모님들은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서

학원을 보낸다던데.

조금이라도 잠을 더 재우려고 한다던데.


아, 아들의 대학을 포기하셨나?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아니 그래도 꽤나 머리가 좋다는 얘기를 곧잘 듣는

아들인데 이렇게 포기하다니...

거 포기가 너무 빠른 거 아니요!

  


가진 장점이 많지 않은 사람이지만

몇 안 되는 그 장점들을 내가 가질 수 있게 된 건,

그 시절 아빠와 같이 운동한 그 경험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싼 학원을 다닌 친구들도,

좋은 집에서 산 친구들도,

많은 용돈을 받은 친구들도.

그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를 나는 누렸다.


한 번씩 돌이켜볼 때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대단한 호사를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러니, 이제 복수전 한 판 뜨시죠?

이젠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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