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비가 추적추적 내린답니다
오후에 동네 도서관을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날이 흐리긴 했어도 비가 올 것 같진 않았는데요.
저녁 무렵 창밖을 보니 비가 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아, 이 기분이 좋다는 건 상쾌하고 발랄한 느낌이라
좋은 것과는 반대입니다.
한없이 침잠해서 주변과 분리되는,
마치 제삼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관조하는 느낌이라
좋습니다.
날씨예보를 거의 보지 않는 편입니다.
갑작스레 비가 오는 걸 즐기기 때문입니다.
우산 없이 나온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가장 가까운 처마밑으로 뛰어가 잠시 비를 피하면서
지금 내리는 비가 곧 그칠 비인지 생각합니다.
아닌 것 같으면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가 가장
저렴한 투명 우산을 하나 사들고 나옵니다.
예전 담배를 피울 땐 라이터를 사는 몇백 원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는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지금은 우산 사는 돈이 제일 아깝습니다.
그럼에도 일기예보를 보지 않는 걸 보면
우산값 5천 원을 갑작스러운 비를 맞이하는
입장료쯤으로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
아, 편의점에서 오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이 투명한
우산도 무척 좋아합니다.
왜인지 집에 더 좋은 우산들이 잔뜩 있어도
막상 비 오는 날 들고나가는 우산은 대게 이 편의점
투명 우산입니다.
투명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며, 걷노라면.
우산 위를 때리는 빗소리와
우산에 맺혀있는 빗방울과
우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들
이 모든 게 다 좋습니다.
그냥 아무 거리나 걸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편의점표 투명 우산과 함께라면 말입니다.
어쩌면 가장 친한 친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비 오는 날 혼자 걸을 때 한정입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좀 전에 밖을 잠시 걷다 왔습니다.
날이 아직 많이 쌀쌀해서 긴 롱패딩을 걸치고
오늘의 베스트 프렌드 투명 우산을 쓰고 말이죠.
아파트 단지 안을 이십 분쯤 걸었을까요.
정신을 차려보니 편의점 앞입니다.
잠시 망설입니다.
어제 와인 한 병을 마셔서 오늘은 쉬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첨부터 나오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 날씨에
편의점 앞에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내리는 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집에서 투명 우산도 가져왔으니 입장료
오천 원도 굳었는데 말입니다.
잠시 후 편의점을 나온 저는 집을 나올 때와
같은 모습입니다.
투명 우산을 쓰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오늘 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걸까요?
롱패딩의 깊숙한 주머니가 수상합니다.
자세히 보니 양 주머니가 처음 집을 나올 때보다
조금 볼록합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초록색 뚜껑이 보입니다.
왼쪽에 한 병, 오른쪽에 한병.
균형을 맞추기 위해 두 병을 산 센스가 돋보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연스레 손을 씻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냉장고에 장수막걸리 두 병을 넣어둡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밤의 산책 이야기를 이렇게 브런치에 풀어봅니다.
지금까지 서울 특파원 박나비였습니다~ :)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