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나비 Sep 13. 2023

미드나잇 인 서울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가끔 굉장히 적극적으로 멍하게 있는 것을 즐긴다.

고도의 집중해제력이 필요한

매우 고난이도의 혼자 놀기 기술 중 하나이다.

(나는 이런 고난이도의 혼자 놀기 기술을 몇 가지

더 터득하고 있다. 필요하신 분은 연락주시길.)   


그날도 즐겁게 고도의 기술을 시전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핸드폰이 울린다.

알람인가? 이 시간에?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뭔가 해야 될 일을 놓친 찝찝함에 힘겹게 바닥을

굴러 전화기로 향한다.


친구E다.

뭐하고있냐고 묻는 E에게

‘지금은 네 전화를 받고 있고, 그 전엔 고도의

집중해제력이 필요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피식 하며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 자존심 상해.


E 뿐만 아니라 예전엔 재밌다고 잘 웃어주던

친구들의 웃음이 요즘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내 고급 유머가 통하지 않는 슬픔보다 친구들의

메마른 감정선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서일까.

회사라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생존을 목표로

살다 보니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얘기에는 반응을

하지 않도록 진화가 된 걸까. 참으로 걱정이다.


친구들이 예전의 유머 감각을 빨리 되찾아야

할 텐데… 웃음을 잃은 친구들을 위해 언제 한 번

내 모든 하이 코드 럭셔리 고급 유머들을 총 동원해

‘깔깔깔, 유머 대소동’편을 한 번 써봐야겠다.

우리의 우정은 소중하니까.  


그렇게 늦은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E와

영화 한 편을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보기로 한 영화는, 3시간의 러닝타임도 짧아

편집하기가 힘이 들었다는 미치광이 천재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개봉 전부터 너무 보고 싶었던 영화라 단숨에 콜은 했지만, 내 갸냘픈 허리가 3시간의 러닝타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었는데,

극장에 도착해서 상영관을 확인하고는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런 세상에! 리클라이너관이다!

역시 센스쟁이 E다!

그래, 뭐 내 고급 유머에 반응을 좀 안해주면 어떠랴,

이렇게 센스가 만쩜인데.


그렇게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뼛속까지

문과인 주제에 이 나이에 물리학을 배워보면

재밌겠다는 주책 맞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밌었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참을 관련 정보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영화의 여운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좋은 영화를 볼 때면 마치 좋은 와인을 마시는

느낌이 든다. 빠져들어 보다 보면 어느새 영화는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마음에 드는 와인을 마실 때도 똑같다.

빈 잔을 채우려 병을 들면 어느새 바닥에 약간의

와인만 남아 찰랑거리고 있다.


마지막 엔딩에서 느껴지는 여운도 그렇다.

맛있는 와인의 마지막 잔을 비우고 나면

뿌듯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찾아오듯

영화도 재밌는 영화를 봤다는 뿌듯함과 함께

재밌는 영화가 끝났다는 아쉬움이 동시에 찾아온다.

그리고 잊고 있다 보면 가끔 기억에서 불쑥 튀어

나와 오랫동안 자신을 기억 하게 하는 점도

비슷하다.


너무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그것도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봐서 그런지

서두가 많이 길어졌다.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 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 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9화, 그럼 시작.




제9화. 미드나잇 인 서울


나는 영상보다 활자를 좋아한다.

이전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모두가 다 잠 든 밤 시작되는 혼자만의 만찬.

한줄기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밤새도록 내릴 것 같은 빗소리,

소복이 눈이 쌓이는 소리와 함께 찾아 오는

한 밤의 적막함이 좋고,

즐겨 읽는 책 한 권이 주는 여유로움이 좋다.


이 시간 만큼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며,

이 시간을 즐기는 동안에는 시간이 흘러 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리고 이때 마시는 와인이 가장 맛있다.   


하지만 이따금 한 번씩은 즐겨 읽는 책 대신

영화를 틀어 놓을 때가 있다.

이때 영화를 선택하는 과정이 참 가관이다.


처음엔, 오늘은 영화나 한 편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넷플릭스 앱을 켠다.

영화 섹션을 찾아보다 시리즈 섹션을 뒤적여 본다.

이리저리 섹션들을 옮겨 다니며 마음은 갈피를

못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걸 볼까? 아니야, 이건 좀 그렇고,

그래 오늘은 이걸 볼까?’로 축약되는 몹쓸 과정을

백 번 정도 반복하다 결국 앱을 꺼버린다.

이미 영화나 시리즈를 백 편 정도 본 것 같은

피곤함이 몰려온다.

이래서 영상보다 활자를 더 좋아하는 건지도.


어쨌든 이 단계를 마치면 괜히 화가 난다.

이 귀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다니.

실수다. 그냥 실수가 아니라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될 엄청난 실수다.

다시는 이러지 말자. 고 다짐을 하지만,

뭐 예상 가능하듯 다음에 또 저러고 앉아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나고 나면,

드디어 오늘의 영화가 선정된다.  

노트북에 고이 모셔져 있는 영화 한 편을

재생하는 것이다.

이럴 거면 굳이 저 과정을 왜 거치나 싶겠지만,

일종의 통과 의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저 의식을 거쳐야만 비로소 이 영화가 선정이

되는 것이다.

(선택 장애를 가진 한 어리석은 인간의 고난한

영화 선정 과정을 볼 수 있는 이곳은 어디?

언제나 당신 곁에, 고품격 와인 스토리,

일상 와인 캠페인입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우디앨런의 2011년도 작품인 이 영화를 나는 너무

좋아한다. 사실 우디앨런의 도시 시리즈

(‘로마 위드 러브 To Rome with Love’,

‘레이니 데이 인 뉴욕 A Rainy Day in New York’.  

특히,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피아노를치며 ‘Everything Happens To Me’를

부르는 장면은 정말이지…)를 다 좋아한다.


하지만 나에게 최고는 로마도 뉴욕도 아닌, 파리다.                

나는 이 영화를 열 번도 넘게 보았다.

즐겨 읽는 책 대신 영화를 택한 날에는 저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 그냥 이 영화를 배경음악처럼

틀어 놓는다.


여기까지 쓰면서, 와인을 소개해도 모자랄 판에

영화까지…이래도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긴 하지만,

이 글에 와인은 한 스푼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해롭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우리에겐 수다 세 스푼이 가장 중요하다.

여긴 그런 곳이니까.         


이 영화를 볼 때면,

나는 특별히 두 병의 와인을 준비한다.

아, 물론 두 병을 다 비우진 않는다.

아주 가끔 두 병의 와인을 다 비울 때도 있지만,

그건 정말 드문 경우이고,

거의 대부분은 반 병 정도씩만 비우고

다음을 위해 남겨 둔다.  


두 병의 와인은

미국 와인 한 병, 프랑스 와인 한 병이다.

무조건이다.

칠레도 안되고, 아르헨티나도 안된다.

이탈리아도 안되고 스페인도 안된다.

무조건 미국과 프랑스 와인이며, 심지어 프랑스

와인은 브랜드도 한 종으로 정해져 있다.

그냥 어느 날 이렇게 정해졌고, 그렇게 계속되다

보니 일종의 결합 상태가 되어버렸다.

감자튀김에 캐첩을 찍어 먹듯,

이 영화엔 저 와인이다.

식초나 간장도 훌륭한 소스지만, 감자튀김을 식초나

간장에 찍어 먹으면 이상한 것처럼,

나에겐 이 영화에 다른 와인을 마신다는 것이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두 와인을 마시는 데에도 나만의 방식이

있다. 이걸 설명하자면 간단하게 영화의 흐름을

알려 드려야 하는데,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당신이라면 이 부분은 넘기셔도…

아니 근데, 이건 스포일러라고 하기엔 좀 뭣한 게,

예고편에도 다 나와있는 내용이다.

넘기지 말고 그냥 보시길. 괜찮다.

이 정도는 알고 보는 게 더 재밌는 영화다.


1920년대의 파리와 그 시대의 예술가들을 동경하는

미국인 작가 ‘길’은 약혼녀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오게 된다.

동경하던 도시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파리의 화려함만을 얘기하고 즐기는 약혼녀와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식만 있지

감성이 없는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그에겐 너무 고역이다.

결국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주인공은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빠져 나와 혼자 한 밤의

파리 거리를 배회하듯 즐긴다.

그렇게 한참을 거닐다 파리의 한 골목길에서

길을 잃고 당황하고 있을 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그의 앞으로

클래식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가다 멈춘다.

우연히 그 차를 얻어 타게 된 주인공은

1920년 대의 파리로 들어서게 되고,

그 곳에서 동경하던 예술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모임에 함께 하게 되는데…


그냥 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다 얘기하면 안될 것 같아 딱 여기 까지만.

아직 못 보신 분들은 꼭 한 번 보시길.

한 장면 한 장면이 ,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참 좋다.

하긴 열 번을 넘게 볼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인데,

뭔들 좋지 않을까.


영화의 초반,

주인공인 미국인 작가가 현재의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부분에서는 미국 와인을 마신다.

이때 마시는 미국 와인은 그때 그때 다르다.

‘롱반’도 좋고, ‘이터’도 좋다.

‘서브미션’도 좋고, ‘브레드앤버터’는 더 좋다.

좀 무리를 한 날은 ‘텍스트북’의 진한 향에

혼자 호들갑을 떨며 진귀한 호사를 즐기기도 한다.

이런 밤은 정말이지 사치스런 밤이다.

이때 마시는 미국 와인들은 오크향이 강조되고,

당도가 있어 부드럽게 잘 넘어간다.

영화의 초반부 미국인 작가와 약혼녀, 약혼녀의

부모님, 그녀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흘려 보듯 넘기기에 아주 적절하다.


그렇게 홀짝 홀짝 잔을 비우다 보면,

어느덧 배경이 180도 바뀌며 주인공은 그렇게

동경하던 1920년대 프랑스 파리로 들어선다.

자, 이때다. 이제부터는 프랑스 와인이다.

이때 마시는 와인은 위에서 말했듯 한 가지다.

‘뿌삐유(poupille)’


좀 전까지 마셨던 미국 와인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당도는 훨씬 덜해 산뜻하고,

얼핏 여린 느낌이지만 산도와 탄닌이 중심을 잡고

있어 흐느적 거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마시고 난 뒷 맛이 약간 쌉싸름한데

그게 또 기분이 좋다.

그 이상의 복잡 미묘한 향과 맛들은 얇고 얕은

습자지 같은 내 실력으로 발라 내긴 힘들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와인 맛있다. 참 좋다.


이제부터는 영화에 조금 더 집중을 하며 마신다.

1920년대 파리의 술집에서 쟁쟁한 예술가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대화를 나누는

이 멋진 장면들을 절대 그냥 흘려 보내선 안된다.

그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오이스터들도 사랑을해요~’ 를 부를 땐

나도 무척이나 경쾌한 그 음을 따라 흥얼거리며

한 잔 한다.

예술과 문학에 대한 본인들만의 관점을 진지하게

나눌 땐 별 다른 조예는 없지만

나도 덩달아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한 잔을 한다.

그러다 아드리아나 역을 맡은 마리옹 꼬띠아르가

나오면! 그때부턴 병 째로 마시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잔을 채우고 비우는 속도가 빨라진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어느새 마치 나도 1920년대 파리의 술집과

뒷골목을 함께 누비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다 주인공이 다시 현재로 돌아오게 되면,

나도 주인공처럼 현재의 파리에서 답답함과

조급함을 느끼며 다시 한 밤의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렇게 열 번을 넘게 본 영화에 빠져,

넋이 나가 있다 보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이 1920년대의 파리를 동경하듯,

그 이전의 시대를 동경하는 아드리아나에게

해주는 말이다.


If you stay here though, and this becomes your present then pretty soon you’ll start imagining another time was really your…you know, was really the golden time. Yeah, that’s what the present is. It’s a little unsatisfying because life’s a little unsatisfying.


이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을 쿡쿡 찌른다.

어느 시대를 살고 있건 현재란 누구에게나 늘

그런 것인가 보다.

이러나 저러나 현재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영화는 마지막에 희망 한 가닥을 보여

준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내가 매번 이 영화를 보는 이유이다.     


영화가 끝나면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남은 와인 두 병의 입구를 잘 막아 둔다.


다음 번 나만의 시네마천국을 위해.



* 제 영화 메이트, ‘뿌삐유(poupille)’에 대해

소개드립니다. 프랑스 와인은 이름도 어렵고,

종류도 무척 다양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대가

위로 올라가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즐기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뿌삐유’는 국내에서 유명한 프랑스 와인 중

하나입니다. 최고의 와인 만화인 신의 물방울에서

극찬한 와인이기도 하고,

돌아가신 S그룹 회장님께서 IOC 위원들에게

대접한 와인으로도 유명합니다.


레드와인 대표 품종 중 하나인 ‘메를로’ 100%로

만든 와인입니다. 오픈하고 바로 마셨을 때

산미가 있는 편이며, 브리딩 시간을 조금 가지면

좀 더 부드러워집니다.

(‘브리딩’은 와인을 오픈하여 일정 시간 공기와

접촉해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다음에 따로 한 번

설명 드리겠습니다.)


진하고 강한 풍미는 아닙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든 다소 여린 느낌인데,

이 여리다는 느낌이 약해서가 아니라

가늘고 가볍긴 하지만 산뜻하다는 느낌에서

여리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와인에 대한 느낌은 굉장히 주관적이니

드시는 분마다 다르게 다가오실 수 있습니다.

‘뿌삐유’도 저처럼 여린 느낌을 받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반대로 오히려 진한 느낌이 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행사가 4만원(할인을 받으면 3만원대에도 구매

가능할 때가 있지만,4만원이면 괜찮은 가격입니다.)

상시가 4만원 중 후반부터 6만원까지 편차가

큽니다. 4만원대에서 구매해서 드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프랑스 와인을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지만,

이름도 어렵고 뭐가 뭔지 잘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당신에게. 그리고 평소 마시던 와인들과는 조금

다른 와인 맛을 보고 싶은 당신에게도.

이 와인 ‘뿌삐유’를 추천드립니다.



*사진출처: 영화스틸컷

이전 08화 당신의 '와겔지수'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