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회사에서 문과출신 마케터로 참 다양한 일을 진행해 왔다. B2B마케팅이라고 싸잡아 말할 수 있지만, 사실 IT회사 또는 제조 엔지니어링 쪽의 회사는 마케팅팀의 업무가 정말 넓고 다양할 수 있다.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아마도 임원진부터 마케팅에 대한 이해가 얕았기 때문에, 이것저것 잘하는 마케팅팀을 사장 직속으로 두고 거의 비서처럼 모든 것을 시킨 적도 있다.
이것저것 일당백 하는 마케터들이 모여 일하니 결과만 놓고 보자면 업무 성과가 좋았지만, 사실 우리 팀원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어려움도 있었다.
엔지니어링 제품의 스펙표만 봐도 수많은 단위 투성이다. 내 눈엔 그저 헤드폰처럼 생긴 기호 옴(Ω)부터해서 갈(gal)은 또 무엇인가. 만유인력상수(지금도 이 단어가 맞는 단어인지 헷갈린다)라는 말은 정말 살면서 처음 들어본 것 같다.
엔지니어들과 자사 제품의 스펙 관련 회의를 하다 보면 수많은 단위가 쏟아지는데, 아무리 경쟁 제품의 스펙표를 외우고 회의에 참석하더라도 단위 모양이 조금만 달라지면 계산이 빨리빨리 되지 않았다. 나는 누가 볼까 싶어 노트북 화면을 최대한 어둡게 하고, 화면 구석에 단위변환 계산기를 작게 켜두곤 했다.
실제로 내가 쉽게 접하고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다 보니, 전체 시스템의 구성을 이해하고 그 안에 각 부품이 하는 일을 이해해야 하더라.
나는 먼저 전체 시스템 스펙과 구조 등이 쓰여진 문서를 정독하고 최대한 외워버렸다. 그리고 실제 시스템을 볼 수 있는 현장을 찾고, 그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사원을 찾아 연락하곤 했다. 시스템 설명을 부탁하면서 나중에 다시 보려고 시스템 내부 사진도 찍고 현장 사진도 찍었다. 아무리 그날 내가 잘 이해했다고 생각해도 나중에 또 기억이 잘 안 나기 때문에 내부 사진은 필수로 찍었고, 내 책상에 돌아오자마자 들은 내용을 정리해 뒀었다. 그리고 모든 제품은 홀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어떤 설비들이 함께 설치되어 있는지 아는 것도 도움이 됐기 때문에 현장 사진도 필요했다. 역시 공부는 예습, 복습이 함께 이뤄져야 기억에 오래 남더라.
그리고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한 번 제품설명 들어서는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가끔 내가 도대체 무엇을 모르는지도 파악이 안 될 때는 정말 난감했다. 그러다 보니 사내 이 부서 저 부서에 조금이라도 안면이 사람이라면 커피고 빵이고 사다 바치며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시스템 설명을 부탁하기가 조금이라도 쉬울 테니까.
마케터라면 응당 담당하는 제품의 마케팅 포인트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엔지니어적 제품은 어떤 스펙이 가장 주요한 스펙인지 단번에 파악하기가 힘들고, 타사의 마케팅 자료를 보아도 한눈에 보이지가 않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마케팅 포인트를 잡는데 오래 걸린다.
나는 이 부분 또한 사내 친분 있는 엔지니어들에게 물어보며 파악해가곤 했다. 각 엔지니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감이 잡히고, 그 감을 따라 자료를 좀 더 들여다보면 우리 제품의 어떤 부분이 가장 도드라져야 하는지, 어떤 부분은 묻어가도 되는지가 보이더라.
어떤 회사든 어떤 직무든 어려움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가 겪었던 것들에 대해서는 실제 당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라도 하길 바란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으면 좀 덜 당황스럽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