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법인으로 시작하면 뭐가 다른가?
지금의 원고를 쓰기 시작할 때 고민했던 것 중 한 가지가 법인으로 출발한 내 이야기가 출판을 시작하는 다른 분들의 상황과 너무 괴리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다른 많은 창업기의 출발이 대개 한 권 제작비와 마케팅비로 한정되는 것과 달리, 나의 경우는 자본금 총액이 1억이었다. 수중에 1억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고, 많은 분이 자본금으로 삼는 퇴직금의 경우에도 1/3은 낡은 건물을 구매해 이사 들어가는 친정 부모님의 창틀 교체 비용으로 쏜 직후였다.
시작은 텀블벅이었다. 책은 만들어야겠고, 코로나가 닥친 상황에 애들 내팽개치고 어디든 입사해 9 to 6 출퇴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텀블벅 정도라면 혼자서 자분자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시작하는 책으로 딱 좋은 콘텐츠가 있어 가까운 디자이너에게 연락했다. 혹시 내가 텀블벅으로 도서 제작에 들어가게 되면, 관련 디자인 작업을 좀 해줄 수 있을는지 물었다. 함께 작업한다면 디자인비는 얼마를 받을 건지도 함께 문의했다. 대답이 왔는데, 그게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뭘 받아요.”라는 것이었다. 그게 얼마가 됐든 당연히 드릴 생각이었지만, ‘내가 뭘 하자고 하면 선뜻 돕는 사람이 있구나.’ 싶은 생각에 순식간에 때 이른 성취감이 차올랐다.
텀블벅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진행하면 좋을까를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가, 제작비를 얻어서 책 몇천 부를 찍는다고 한들, 그럼 그게 무슨 의미일지가 다시 고민이 되었다. 얼마 되지도 않을 수익금을 얻는 게 내 목표는 아니지 않은가. 기왕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면, 장기적으로 책을 만들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가만히 전화번호부를 훑기 시작했다.
ㄱ에서 시작해 ㅍ으로 넘어가는 동안, 뭐 이렇게 아는 사람이 없나 초조해졌다. 업계에서 14년을 일하면서도, 재직했던 두 곳 직장 말고는 연줄이란 게 없었다. 진짜 회사에서 시키는 일 열심히 하고 애 키운 게 전부였구나 싶은 초라함이 밀려왔다. 그러다가 마지막 ㅎ 항목에 다다르자, 첫 회사에서 형님 동생 하며 지낸 휴먼큐브 황상욱 대표님의 이름이 등장했다. 임프린트로 출발해 500만 부 시리즈 론칭에 성공한 그야말로 ‘독립’ 출판의 선배였다. 각자 이직한 후 10년 동안 딱 두 번 연락한 게 전부일 정도로 소원했던 사이였지만, SNS를 통해 서로가 어떤 책을 내고 있는지를 꾸준히 체크하던 터라 선뜻 시간 좀 내주십사 하는 연락을 했다. 흔쾌히 그러마고 하는 답장이 왔다.
무슨 보따리상처럼, 나는 내가 브랜드를 만들게 된다면 어떤 책을 내고 싶은지, 기왕에 텀블벅으로 준비했던 아이템을 싸 들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쳤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책 얘기가 나오자 나는 가방에 들어 있던 책을 꺼내 보여드리면서, 내가 이런 책을 만들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귀사에 들어가서 임프린트 형식으로 일해도 좋고, 아니라면 그냥 직원으로 있어도 좋으니 브랜드를 하나 만들고 싶다고 말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생각하실 법한데도, 돌아온 대답이 놀라웠다. “아예 법인으로 시작해보는 게 어때요?”
사실, 책 만드는 것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였던 나는 법인을 시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상욱 대표님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게, 각각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안을 한 번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줄 테니, 고민해 보라셨다. 대표님 역시 크게 일궈놓은 시리즈 이후의 회사 경영에 대해서 고민하던 차에 나의 연락을 받았고, 브랜드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나의 고백에 내면에서부터 승부사 기질을 자극하는 어떤 도전심이 끓어오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취업 후 팀장급으로 일하며 브랜드를 만드는 안, 임프린트를 시작하는 안, 법인을 시작하는 안으로 선택지가 결정되었다.
첫 번째 팀장급으로 취직하는 안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두 번째 임프린트 설립에 대해서는 생소하신 분도 있을 듯한데, 말하자면 기획이나 편집 능력을 갖춘 편집자나 마케터가 대형 출판사의 디자인, 제작, 유통, 마케팅, 관리 시스템을 빌려 쓰면서 일정 기간 안에 일정 매출을 달성하리라는 합의를 한 후 대표라는 직함으로 연봉을 받으며 책을 만드는 시스템이다. 책을 만들고 나면 대형 출판사의 디자인, 제작, 유통, 마케팅, 관리 인프라를 활용하여 도서를 유통하고 달성한 이익을 약속한 비율로 회사와 배분한다. 작은 출판사에 적용되는 핸디캡 없이 대형 출판사와 같은 수준의 공급률과 수금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고, 혼자 책을 만들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마케팅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제작 퀄리티와 유통상의 투명함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하겠지만 이에 대한 비용을 지급해야 하고, 사업자등록증을 낼 수도 없다. 그야말로 초대박이 터지는 것이 아니고서야 독립 가능성이 요원하다는 것이 임프린트의 큰 단점이다. 아주 일부이겠지만, 자회사에서 원하는 만큼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문제로 애를 먹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비용을 지급하고 대형 출판사의 서비스를 소비하는 임프린트 입장에서는 당연히 일정 수준 이상의 마케팅 지원을 받길 기대하는데, 서비스를 제공하는 출판사의 인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서비스를 받는 처지에서는 엄연히 비용을 내고 이용하는 서비슨데 고작 이것밖에 못 해주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고, 제공하는 처지에서도 안 팔리는 걸 어쩌느냐, 이것보다 어떻게 더 해주냐는 심정일 수 있다. 애초에 쌍방이 신뢰할 수 있는 관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구조적인 갈등이 적지 않은 듯하다.
내가 선택한 안이 세 번째 법인 설립이었다. 임프린트와 달리, 나는 3:7의 비율로 나의 자본을 출자했다. 3,000만 원을 투자금으로 댔다는 말이다. 따라서 수익이 발생하면 이를 3:7로 배당하고, 배당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종국에는 100퍼센트 내 회사로 만들어나가는 방식이다. 많은 회사가 매우 복잡한 배당제도를 시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의 경우 지분 변경과 목표 배당금 허들이 타 출판사보다 낮은 편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까지 여러 차례 계약서 항목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았는데, 이렇게 세부내용을 조율하는 와중에 진심으로, 내가 브랜드를 제대로 만들어서 어엿한 출판사를 만들게끔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내가 돈을 못 벌면, 대표님도 돈을 못 버는 구조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남편과 “오……!” 하고 감탄했다.
내가 잘하기만 하면 되는 구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