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란씨와 총자

5. 형광팬 캠프

by 박구사


코스트코에서 우유 가격을 후려치는 날은 대체로 수요일이라는 것.

우유가 아무리 싸도 가방이 뜯어질 만큼 담아서 오면 가방도 터지고 우유도 터지고 내 속도 터진다는 것.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오란씨를 품에 안고 과자를 담은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집으로 간다. 봉지에 같이 담으면 오란씨가 흔들려서 도착하자마자 바로 마실 수가 없다. 귀한 탄산음료가 부글부글 넘치게 되니까. 회사에 다닐 때는 코카콜라를 마셨지만, 요즘은 오란씨를 마신다. 덩달아 CM송도 자주 부른다. 부를 때마다 별을 보기 힘든 서울 하늘 아래서 부르니 더 각별한 맛이 나는 가사라고 생각했다. 달콤한 목소리로 별을 따다 두 손에 담아준다고 노래하지만, 실상은 별을 따기는커녕 보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사실 요즘 오란씨를 자주 마시는 건 돈 때문이다. 코카콜라는 거진 3천 원인데 오란씨는 할인받으면 천 원이면 살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버는 돈은 족족 시험공부에 들어갔다. 통장의 잔고를 파먹고 살기 시작한 다음부터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을 때는 오란씨로 타협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오란씨도 썩 맛있었고 특유의 탄산에도 적응되었다. 오란씨는 김이 빨리 빠져서 다음날만 되어도 톡 쏘기는커녕 슬쩍 툭 치는 듯한 탄산만 남았지만, 초등학교 때 먹던 슬러시 맛이 나서 좋았다. 사실 내 수입은 너무 짜서 가계부에 물을 타야 할 지경인데. 적응을 못 하면 어쩔 거냐.


이런 상황이라 <무한도전>에 합격하고 나서도 새 옷을 살 생각은 못 했다. 주변에는 합격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빼입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진짜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집에 있는 옷이면 되겠다 싶었다. 그러나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들들 볶았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이 독한 놈. 구두쇠. 짠돌이.’


주변 성화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신발을 사러 명동에 갔다. 사실 신발은 안쪽 뒤꿈치 부분이 다 찢어져서 스펀지 정도가 아니라 플라스틱이 보였다. 그전부터 짠돌이긴 했지만 나도 신발 뒤꿈치에 플라스틱이 들어있는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전보다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다.

덕분에 알게 된 다른 것들도 많았는데 예를 들면 중고 창문형 에어컨으로 7평을 시원하게 하는데 한 달 3만 원이면 된다는 것. 창문형 에어컨 설치비와 앵글 값은 합쳐서 25만 원이지만 내가 동네의 버려진 합판과 가구를 잘라서도 앵글을 만들고 설치할 수 있다는 것. 그걸 마치고 나면 하루치 공부를 날렸다는 자괴감과 근육통에 몸서리치게 된다는 것. 그래도 시원한 곳에서 몸서리치는 게 낫다고 위안하며 다시 책을 펴기는커녕 <무한도전>을 보게 된다는 것. 코스트코에서 우유 가격을 후려치는 날은 대체로 수요일이라는 것. 우유가 아무리 싸도 가방이 뜯어질 만큼 담아서 오면 가방도 터지고 우유도 터지고 내 속도 터진다는 것. 절약하며 사는 것은 오란씨의 탄산뿐만 아니라 이렇게 많은 것들을 새로 알려주었다.


고시원에서 살면서 아등바등 모은 돈은 오피스텔을 구하면서 상당 부분 사용했다. 시험 자격 요건을 채우기 위해 대학에 편입한 지금은 등록금도 내야 했다. 결정적으로 수험생활이 얼마나 길어질지 몰랐기 때문에 최대한 아껴야 했다. 공기 빼고는 뭐든지 아낄 방법을 궁리하며 지냈다. 그런 나도 신발은 새로 사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신발 상태는 참혹했다. 동생은 현관에서 내 신발을 볼 때마다 '이제 이 아이를 그만 놓아줘야 한다.'라고 했다.


명동은 ABC 마트, 레스모아 등등 신발 매장이 많았다. 다년간의 노하우로 명동 신발매장이 가장 저렴하고 물건도 다양하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에 10만 원을 가지고 신발 매장으로 갔다. 이 돈은 아끼지 않고 꼭 다 쓰고 와야지 하고 다짐했다. 매장 여러 곳을 기웃거렸지만,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마음에 드는 모델들은 예산을 초과하기 일쑤였다. 그중에 마음에 꼭 드는 나이키 신발이 있었으나 12만 원이었다. 고민 끝에 아디다스 코너로 발을 돌렸다. 내 신발은 아디다스가 많았는데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나이키보다 조금 싼 신발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번에도 조금 저렴하고 괜찮은 신발을 찾았다. 짙은 회색에 디자인도 예뻤고 발도 편했고 무엇보다 가격이 10만 원이었다. 거의 마음을 정하기 직전. 같은 모델을 6만 원에 팔고 있었다. 이럴 수가. 6만 원? 짠돌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비록 빨간색이지만. 사실 빨간색이라기보다는 잘못 말린 고추 끝처럼 약간 다홍색에 가까운 미묘한 색이지만. 거의 반값 아닌가! 4만 원을 아끼고 빨간 신발을 신느냐 아니면 처음 다짐대로 10만 원짜리 맘에 드는 신발을 사느냐.


집으로 돌아와 동생 앞에서 신발 상자를 열었을 때 엄청나게 혼났다.


“빨간색이지만 예쁜 빨간색이라 산 거야. 싸서 산 거 아니야. 정말이야.”


동생이 혼을 내다 못해 속상해했기 때문에 결국 옷을 좀 사기로 했다. 당시 내 친구 중에 가장 옷을 잘 입는 ‘총자’라는 놈이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팔고 있었다. 옷을 한 장도 팔아주지 못해서 항상 마음의 짐이었는데 이 기회를 통해 옷도 사고, 친구 옷이 방송에도 나오면 좋겠다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냐?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 나 옷도 좀 사고”


한참 말이 없던 총자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정말 옷을 사려고 전화했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무슨 심각한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최근에 다단계를 시작하거나 결혼하느냐고 자꾸 되물었다.


‘아, 나는 옷 파는 놈에게 옷 팔라고 전화해도 믿지 않을 정도로 짠돌이였단 말인가.’


압구정에서 만난 총자는 여전히 멋쟁이였다. 대학 때 새긴 발목에 카세트테이프 모양의 문신 말고도 각종 모양의 문신이 새로 생겼고, 긴 머리와 알 없는 뿔테 안경도 잘 어울렸다. 나도 10년 가까이 서울에 살지만 제천에 살 때랑 똑같은데, 이놈은 진짜 서울 사람 다 되었구나 싶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술집으로 향했다. 걷는 동안 총자는 디자이너답게 내 옷을 보고 바로 광장시장에서 산 걸 알아봤다. 너 같은 놈만 있으면 나 같은 옷 장사 굶어 죽는다며 앓는 소릴 했다. 나도 너처럼 보험 가입 안 하는 놈들 때문에 회사 망해서 공무원 시험 친다고 징징거렸다. 한 잔 두 잔 마시면서 그동안의 넋두리를 풀었다. 여전한 촌놈이든 서울 사람 같은 촌놈이든 이놈의 서울살이가 얼마나 팍팍했는지 술로 적시지 않으면 삼키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사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첫 잔을 부딪치기도 전에 알았다. 총자 얼굴을 본 건 2년 만인데 6살은 더 먹어 보였으니까. 나도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더더욱 총자가 만든 옷을 사야겠다 싶었다. 옷이 방송에 나갈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 컷이라도 나가서 혹시 매출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도와주고 싶었지만 나도 사정이 빤한지라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였다.


술을 마시고 옷을 보러 창고 겸 매장 겸 집인 총자네 옥탑방에 올라갔다. 산더미처럼 쌓인 옷 가운데 맨투맨과 민소매 셔츠 2장, 모자 하나를 골랐다. 한국인은 지인에게 무언가를 구매할 때 특유의 시트콤을 한바탕 치른다. 시트콤은 먼저 지인이 가격을 물어보면 주인이 화를 내고 지인은 그런 주인의 주머니에 돈을 강제로 욱여넣으며 시작된다. 토종 한국인인 우리 둘도 그걸 피할 순 없었다. 봉투에 담긴 돈은 이 손 저 손을 옮겨 갔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주머니에 강제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가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그래도 마지막엔 총자와 같이 사는 동생에게 강제로 돈을 쥐여주고 나왔다.


검정 봉지에 옷을 담아 나오면서 자꾸 돈이 모자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새 옷을 사질 않으니 얼마나 줘야 했는지 개념이 서질 않았다. 캠프 다녀온 후에 총자를 불러 맛있는 제주도 흑돼지를 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술로 적시지 않아도 삼킬 수 있는 부드러운 이야기가 쌓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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