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가 몇 명을 살렸을까
4. 아직도 무한도전을 봅니다
“이게 뭔가요?”
“만약 그 병이 맞으면 너도 이렇게 된다는 거야.”
'이 노래가 몇 명을 살렸을까?'
무한도전 단체곡 '그래, 우리 함께' 동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살다 보면 어금니를 사려 물어야만 버틸 수 있는 날이 온다. 그런 날은 하루만 겪어도 집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하고 쓰러진다. 진이 빠질 때로 빠져서 몸이 텅 빈 것 같다. 텅 빈속은 뭐라도 좀 먹어야 채워질 텐데 저녁밥도 먹기 싫다. 어느새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가득 차서 밥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멍하니 누워 천정을 바라보다 구레나룻이 축축해지면 그제야 내가 울고 있는 걸 깨닫는 그런 밤. 그런 밤은 잠들기 어렵다. 왠지 오늘이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보통 들어맞는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버텨도 그런 날은 쉽게 지나가지 않더라.
작가 허지웅은 악성림프종에 걸렸다. 방송을 모두 그만두고 치료에 들어간 그는 눈썹까지 다 빠질 정도로 지독한 항암치료를 받는다. 침대에 누우면 천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일 정도의 고통스러운 날들. 웃어본 것이 오래된 농담처럼 느껴질 정도로 계속 힘들기만 하던 어느 날.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우연히 본 티브이에서 무한도전이 나오고 있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어느새 피식거리며 웃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순간만큼은 보통 사람으로 돌아간 듯 고통을 잊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항암치료 내내 무한도전을 찾아보며 길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견뎌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의 이십 대와 삼십 대는 '힘겨운 날들을 버티며 살아낸 거야.'라는 가사에 꼭 맞다. 덕분에 나는 힘겨운 날들을 버티는 것이라면 제법 자신이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있다는 게 상처가 안 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상처가 나도 몸을 움직이는 데 익숙하다는 뜻이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출근은 해야 하고 돈은 벌어야 한다. 별로 특별하거나 슬픈 이야기도 아니다. 나도 당신도 매일 그럴 테니.
내 어두운 터널 같은 시기는 꽤 길었는데 그 터널이 시작된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2005년 10월의 막바지였고 철원에서 두 시간쯤 걸려 도착한 국군 병원의 나무들은 벌써 이파리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날 진료를 기다리는 내 바로 앞에는 벙어리장갑을 낀 키위 같은 머리통을 한 병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제 갓 일병을 단 것처럼 작대기 두 개가 반짝이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좀 이상해 보였다. 아직 장갑을 낄 정도로 춥지 않았는데 왼손에만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지난번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데 혹시 양성이면 어쩌지 하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름도 생소한 병. 지난번 내 피를 뽑고 난 군의관이 잠깐 보여준 책에는 허리가 거의 반쯤 접힌 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남자의 흑백사진이 있었다.
“이게 뭔가요?”
“만약 그 병이 맞으면 너도 이렇게 된다는 거야.”
군의관은 무심하게 말했지만 나는 갑자기 귀싸대기를 맞은 것 같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진료는 끝났다. 하루에도 몇백 명의 환자를 상대해야 하는 군의관에게 나 같은 병사에게 할애할 시간은 짧은 것이다. 책을 찾아서 사진을 보여준 배려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병명도 어색했지만, 혹시나 까먹을까 봐 계속 되뇌며 벤치에 앉았다. 당시에는 군대에서 인터넷을 할 수 없었으니 전화라도 해서 이 병에 대해 물어봐야 했다. 그렇지만 가족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인터넷을 할 줄 모르셨고, 동생은 걱정할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10월의 나무 이파리보다도 내 피가 더 빠르게 마르는 것 같았다.
피가 마르는 2주간의 기다림 끝에 이제 내 앞에는 벙어리장갑 낀 키위 머리 병사 한 명만 남았다. 이 병사의 진료만 끝나면 바로 내 차례였다. 널찍한 진료실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병사들이 많았고 변변한 칸막이 같은 것도 없어서 앞사람 진료를 서너 명이 어깨너머로 볼 수 있었다. 키위 머리 병사가 군의관 앞에 앉았다. 그가 장갑을 벗자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집게손가락은 뒤틀린 번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뭉개진 찰흙처럼 생긴 손가락은 손톱도 없었고 둘째 마디와 셋째 마디 사이에는 이어붙인 흔적이 있었다. 손가락은 방향이 좀 어긋나게 붙어있어서 번개 같기도 하고 뒤틀린 나뭇가지 같기도 했다. 손가락 여기저기에는 철사처럼 보이는 것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군의관은 무심한 눈으로 손가락을 쿡 집더니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키위 머리 병사는 소리도 못 내고 자지러지며 손가락을 따라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차트에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써넣는 군의관에게 키위 머리 병사가 말했다.
“저, 일단 봉합만 하고, 성형수술을 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언제쯤 해주십니까?”
군의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제가 잘은 모르지만 이게 더 두면 좀 안 좋을 것 같지 말입니다. 부모님도 보실 때마다 걱정을 많이 하셔서...”
“이건 나가서 수술해야지. 여기선 못해. 참아.”
군의관의 저 '참아.'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었다. 나가서 수술을 할 때까지 참으라는 뜻과 지금 당장 닥칠 고통을 참으라는 뜻. 군의관은 참으라는 말과 동시에 키위 머리 병사의 손가락에 튀어나온 철사를 잡아 뽑았다. 키가 큰 병사는 아이같은 비명을 질렀다. 잠시 뒤 넋이 반쯤 나간 병사가 진료실 밖으로 나갔고 이제 내 차례였다. 엉덩이가 의자에 채 닿기도 전에 군의관이 말했다.
“어? 양성이네. 약 먹고 쉬어야겠다.”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군의관을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쉬더니 마른세수를 한번 했다.
“말해줬던 병 맞으니까. 의병전역을 시켜달라고 하던지, 군 병원에서 버티다가 나가서 치료하던지 해. 치료제는 없으니까 진통제 타가. 뭐해? 안 일어나? 뒤에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 다음!”
그 이후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웃었던 거 같기도 한데. 하지만 그날이 깜깜한 터널의 시작이었다는 건 선명하다.
그 이후의 시간들은 너무 길고 깜깜해서 터널을 지나간다는 비유가 가장 적절하다. 그 터널 안에는 병원비를 벌어 보겠다고 단밤 노점을 시작한 내 전 재산을 들고 도망친 까만 양복의 신사도 있었다. 국가유공자가 되게 해 준다고 했었다. 영하 이십 도까지 떨어진 날 장사를 나온 내 손에 따뜻한 홍삼차에 비타민 한 알을 쥐여준 할머니도 있었다. 고생을 많이 한 아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별의별 사람을 만나고 별의별 일을 겪으며 직업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터널 같은 시간들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견뎌야 하는 터널은 여전히 어둡고 울퉁불퉁하며 뾰족한 것들이 널려 있었다. 반대편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다 보니 상처가 끊이질 않았다. 도처에 상처를 주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렇지만 아파도 돈은 벌어야 했기 때문에 잠시 멈췄다가도 다시 뾰족한 것들이 가득한 터널을 나아갔다.
나는 그렇게 터널을 지나며 상처가 나도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익혀갔다. 거기서 나는 대부분 스스로를 때리고 가끔 달래며, 드물게 안아주었다. 스스로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여기가 학교인 줄 알아?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잘해야지.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사회는 결과가 전부야!' 같은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기 때문이다. 가끔 나를 달래고 드물게 안아주는 것도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를 끌고 긴 터널을 걸었다.
터널을 지나는 모든 순간이 캄캄했던 것만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글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터널을 지나다 가끔씩 빛을 만나기도 했다. 내게 홍삼차를 건넨 할머니나 손님들이 버린 단밤 상자를 주워다 주신 파지 줍는 아주머니. 이런 분들의 친절과 호의는 나에게 환한 빛과 같았다. 또 어떤 빛은 일주일마다 찾아왔다. 매주 토요일 6시 30분에.
무한도전은 대부분 나를 웃기고 가끔 감동하게 하며 드물게 울렸다. 그 적절한 조합은 마치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웃음이 필요할 때 웃음을 주고, 울음이 필요할 때 시원하게 눈물을 쏙 빼줬다. 팍팍한 하루에 지쳐 세상에는 더 이상 어떤 기적과 감동도 없을 거라 믿을 때면 그것들을 보여주었다. 내겐 댄스스포츠 특집이 그랬다. 이후 이어진 봅슬레이 특집, 레슬링 특집, 조정 특집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의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뭐 하나 제대로 성공한 도전이 없을지 모른다. 대회에 나가서 수상은커녕 제대로 끝마치는 게 목표였던 도전들. 그것은 누군가에겐 모자란 결과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모든 도전들과 모자란 결과 덕분에 또 다음 일주일을 살아낼 힘을 얻었던 사람이다. 무한도전은 내게 세상은 아직 살만하고 노력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줬다. 정신승리나 책임지지 않는 달콤한 말뿐이 아니었다. 무한도전이 보여준 '노력'은 이 엄격하고 까칠한 세상에 '모자란 결과'를 납득시켰다. 그 모든 도전들에 박수를 보내고 우리가 무한도전을 사랑했던 것은 그것 때문일 것이다.
무한도전 덕분에 나는 길 위에서 신나게 장사할 수 있었다. 매출이 얼마던, 실적이 얼마건 간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노력한 나를 다독여주는 법을 배웠다. 회사에서 모욕을 당해도 지난 특집을 찾아보며 시원하게 웃고 풀어버렸다. 고된 일주일을 겪으면 치킨에 맥주를 차려놓고 무한도전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는 사이 어느새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터널을 빠져나온 것이다. 터널을 빠져나온 나는 여러 가질 배웠다. 끝이 없는 터널은 없다는 것과 터널을 지나는 동안 배운 것들 덕분에 내가 조금 더 행복해졌다는 것.
허지웅과 내가 그랬듯. 아직도 버티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무한도전을 찾아보며 위로를 받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여기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은 결국 지나간다. 그 날들을 지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상처가 생기지만 어쩔 수 있으랴. 좋은 것들에게서 위로를 받으며 아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중에 무한도전을 보며 아문 상처들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좋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좋아하는 특집과 지나온 시간을 함께 이야기한다면 더 좋겠지. 이야기하던 누군가가 '그래 우리 함께'를 부르면 눈물바다가 될지도 모르겠다. 멤버들이 쓴 가사를 옮겨 만든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터트린 형돈이 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