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거절할 수 없는 술잔을 주지
3. 아직도 무한도전을 봅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공정한 인사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인사철마다 생기는 알 수 없는 결과와 주말 골프장 운전기사를 자처한 이들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회식이 싫다, 너무.
하반기에 원주 독립출판 교류회에서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글을 모아서 책을 내자고 했을 때. 나는 바로 '회식'이 떠올랐다. 회식은 내가 참여하는 수많은 가면극 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 중에 하나다.
윗사람들이 월급을 그냥 줄 수는 없으니 던져대는 일거리를 나 또한 월급을 그냥 받을 수는 없으니 꾸역꾸역 처리한다. 사무실 가면극의 줄거리다. 여기서 쓰는 가면들은 가끔 불합리하거나 답답하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목적성이나 규칙성은 담보된다. 어쨌든 '일을 처리한다'는 커다란 줄거리가 있다 보니 가면극은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뤄진다. 국장, 과장, 소장 등 정해진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상대의 행동과 내가 해야 할 행동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도 비슷하다. 따라서 비교적 덜 불안하다.
회식이 싫은 이유는 기본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날 마신 술의 양과 기분, 참석한 구성원, 심지어 날씨와 장소에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상대방의 가면도 순식간에 바뀐다. 중국의 가면극 변검처럼 술잔이 스칠 때마다 확확. 술기운이 올라갈수록 언제는 과장이었다가 언제는 인생선배(내가 원하지 않음에도)로 변하더니, 언제는 능숙한 투자자(내가 부동산에 관심이 없어도)가 되어 쓰잘데 없는 조언을 건네다가, 순식간에 사회운동가(애도 안 낳는 요즘 것들을 비난하며), 가정의 수호자(매일 아내와 전화로 싸우면서도)로 변한다. 회식이라는 무대 위의 가면극은 이렇게 아비규환인데 참석해도 아무 이득은커녕 손실만 있다. 근무의 연장이라면서 돈도 안 주고(제일 화남), 내 개인 시간을 뺏는다(두 번째로 화남). 거기다 술 마시면 근손실도 온다. 도대체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
나는 <무한도전>의 거의 모든 부분을 사랑하고, 특히 무한상사는 내가 손에 꼽는 최애 특집이다. 야유회부터 회사 로고 만들기, 점심메뉴 정하기, 명절에 상사 챙기기 같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준하 형의 정리 해고 특집은 몇 번이나 돌려봤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회사를 나와서 공무원 시험을 보게 된 데에는 무한상사 특집이 큰 영향을 주었다. 짐을 싸서 회사 로비를 나서는 준하 형을 보며 나도 조만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무한상사의 회식 장면은 유난히 보기 힘들었다. 재미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다른 특집보다 유난히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괴로웠다. 박 차장이 머리에 넥타이를 묶을 때부터 가슴이 서늘해졌다. 유 부장 어깨에 손을 올리고 머리에 술잔을 털자 비슷한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분위기에서 누군가 야자타임을 제안하자 눈을 질끈 감았다. 회식과 야자타임은 휘발유와 불꽃과도 같아서 둘이 만나면 반드시 인명피해가 뒤따른다. 내가 직접 겪은 회식과 야자타임의 결합은 폭발한 부장님이 깐족거리던 대리님 머리에 마른안주가 담긴 쟁반을 내리치면서 끝났다. 오징어와 대구포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장면이 생생하다. 함께 날아간 마요네즈와 간장 종지는 옆 테이블 머리 긴 여자분 정수리에 안착했다. 무한상사에서도 회식과 야자타임의 위험한 결합은 인명피해를 불러왔다. 박 차장이 깻잎 두장을 들고 차를 타러 나가다 차에 치이며 마무리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다음날 멀쩡히 출근한 것까지 완벽하다. 극사실주의 연출가 김태호.
만악의 근원인 술은 보통의 술자리보다 회식 자리에서 더 흉악해진다. 보통의 술자리와는 다르게 회식에서 만취한 자는 다음날 숙취 환자로 끝나지 않는다. 사무실 출근과 함께(보통 지각하여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자리로 걸어간다) '어제 기억 안 나세요?' 나 '김대리, 잠깐 나 좀 보지?' 같은 무서운 소리를 들어야 하는 형벌이 따라붙는다.
내 첫 회식은 보험회사 월 마감 회식이었다. 100여 명의 영업조직에 유일한 남자 이자 24살짜리 신입이었던 나는 첫 회식에 말 그대로 '던져졌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긴 힘들다. 다만 회식이 끝나고 단추가 다 뜯긴 셔츠를 캘리포니아 해변 스타일로 명치쯤에 묶고 집으로 걸어갔다고만 말하겠다. 울먹거렸던 거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나의 회식 라이프는 그 후로도 몇 번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예를 들어, 티셔츠 등짝에 누군지 모를 발자국이 나있었다던지. 책상 위에 왠 타다남은 굵은 양초와 깨끗하게 닦인 처음 보는 구두 한쪽이 올려져 있다던지. 옷장에 긴팔 옷들이 반팔이 되어있다던지(잘린 소매는 양말 서랍에서 나왔다) 하는 평범한 일들이 벌어진 이후. 나는 회식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킬을 하나둘씩 개발해 나갔다.
스킬 0. 회식 날에는 가방을 챙기지 않는다.
회식 날 중간에 자연스럽게 빠지기 위해서는 가방을 챙기지 않는다. 가방을 챙겨서 일어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박 대리 어디가? 도망가는 거 아냐?'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성격이 좀 나쁜 상사라면 가방을 빼앗아 자기 옆에 두기도 한다.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방을 아예 두고 출근하거나, 챙겼더라도 최소한 회식 장소가 아닌 외부 다른 곳에 보관하도록 한다.
스킬 1. 이온음료든 물이든 잔뜩 마셔라.
소주를 한잔 마시면 물은 한 컵이 기본이다.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술이 덜 취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회식에 가기 전에 여유가 된다면 이온음료를 잔뜩 마시고 가는 것도 좋다. 특히 편의점에 가면 이온음료는 보통 2+1이나 1+1 행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걸 주는 대로 다 마시고 회식에서 물까지 자주 마시면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 사실 화장실에 들락날락거리느라 취할 새도 없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스킬 2. 손은 눈보다 빠르다.
술 버리기. 보통 맥주 글라스나 물컵을 테이블 밑에 놓고 술을 몰래 버리는 게 기본이다. 테이블 밑에 손이 내려갔다 올라오는 게 신경이 쓰인다면 테이블 위 물수건에 붓고 나중에 테이블 밑에 둔 컵에 짜내면 된다. 내 생각에 관건은 무심하게 툭 버리는 것. 긴장해서 뻣뻣하게 움직이거나 얼른 버리려고 빨리 움직이면 티가 난다. 그냥 툭. 이게 숙달되면 열에 여덟은 안 걸린다.
파생 스킬 2-1. 임기응변을 준비해라.
가끔 술 버리는 타이밍이 좀 안 맞았을 때. 그러니까 열에 둘 정도 되는 상황인 술을 버리다 눈이 딱 마주쳤을 때 말이다. '자네 지금 뭐하나?' 하고 정색하는 상대방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임기응변과 대수롭지 않다는 행동이다. 한마디로 '아. 머리카락이 들어가 있어서요.' 하고 다시 잔을 쓱 내미는 것이다. 전혀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해야 상대방도 뭐라고 하기 애매해진다.
입사 첫 회식에서 밑에 놓아둔 컵에 술을 버리다 걸렸다. 하필 상대가 욕 잘하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과장이었다. 정색한 과장이 '너 밑에 컵 뭐야 인마, 지금 퇴주 잔 깔아놓은 거야?' 하고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전부 쳐다봤다. 신입들에게 막대하기로 유명한 인간이라 짧은 순간 나를 안쓰럽게 보는 눈길들이 느껴졌다. 눈빛을 거의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는데 '어휴, 불쌍한 신입이 또 뭐하나 걸렸나 보다.'였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거 물 잔인데요?' 하고 글라스 가득 있는 술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컵을 탁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과장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한 3초 정도 그러고 있자 허. 하고 과장이 소주병을 다시 잡았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자자, 얼른 받고 소주 한잔 따라드려 어쩌고 하면서 어색한 공기를 흩어냈다. 어차피 마셔야 했을 술을 마셨을 뿐이다. 좀 재수가 없었을 뿐. 어차피 완벽한 방법은 없고 재수 없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더군다나 여긴 재수 없는 사람이 술에 취하기까지 한 회식자리 아닌가.
스킬 3. 책상 밑으로 도저히 손이 안 내려가도 살아남을 방법은 있다.
눈보다 빠른 손도 없고, 임기응변에도 자신이 없는 사람을 위한 방법이다. 회식 자리가 고깃집이고 밑반찬으로 동치미 나오는 곳이면 금상첨화다. 일단 술을 버릴만한 그릇을 점찍어둔다. 동치미 그릇이든, 물컵이든, 맥주잔이든 상관없다. 점찍은 그릇을 알맞은 장소에 두고 타이밍에 맞게 술을 버리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술을 버린 그릇에 반드시 고기나 반찬 따위를 담근다. 누군가 술을 버린 동치미를 마셨다가 '뭐야, 누가 여기 아까운 술을 버려놨어?' 하고 소리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동치미나, 고춧가루가 떠다니는 물은 마실 사람이 없으니까.
스킬 4. 생각보다 너에게 관심이 없다.
참여 인원이 많을수록 효과적인 마인드 셋이다. 신입들에게 나가서 바람을 자주 쐬라는 조언을 하면 나갔다가 혼나면 어떻게 하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니 혼 좀 나면 어때서? 거기다 화장실에 사람이 많았다는 핑계부터 얼마나 대꾸할 거리가 많은데 그런 걱정을 하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보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당신이 화장실에 가든 바람을 쐬러 가든 자리를 왔다 갔다 하든 간에 각자 자기 살기 바쁘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마시기 바쁘고, 아부 떨기 좋아하는 사람은 간부들 잔 채우느라 바쁘다. 당신이 앉아 있었는지 어땠는지 사실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니 자주 들락날락거리면서 술잔을 피하시라.
스킬 5. 마무리만 똘똘하게 해도.
스킬 4와 연계해서 사용하는 스킬이다. 나는 일 차가 슬슬 끝나가면 머릿수를 센 다음 먼저 쓱 빠져나간다. 그리고 곧장 편의점에 달려간다. 그리고 머릿수만큼 아이스크림을 산다. 주머니 사정이 좀 나을 때는 꿀물을 사기도 한다. 둘 다 2+1이나 1+1 행사를 자주 하기 때문에 비교적 부담도 적다.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회식장소에 돌아가서 하나씩 챙겨주면 게임 끝이다. '아니 박 대리 왜 이렇게 안 보이나 했더니, 이거 사러 갔었구먼? 고마워 잘 먹을게.' 하는 칭찬과 함께 자주 자리를 비웠던 것도 납득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가끔 이 스킬을 알려주면 특정 간부 몇 명만 비싼 숙취해소 음료를 사주고 나머지는 메로나를 먹이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사무실마다 꼭 한두 명씩 있는 물어뜯기 좋아하는 인간은 공짜 메로나를 먹으면서도 험담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인간들 에게 간부만 챙기는 모습은 딱 물어뜯기 좋은 부분이다. 괜히 돈 쓰고 욕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술 취한 인간들 입에는 모두 똑같은 메로나를 물려주자.
그냥 회식 못 간다고, 가도 술은 안 마신다고 하면 되지 뭘 그런 구차한 방법까지 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왜 회사원들이 회식에 목을 매는지. 술잔을 받지 않았을 때 받을 불이익이 가늠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월급을 세 번 받기도 전에 회사가 평행세계 임을 깨닫는다. 겉으로 드러난 회사와 속에 숨겨진 진짜 회사는 평행세계처럼 공존해있다. 겉으로 드러난 회사는 모든 제도가 합리적이고, 의사결정은 수평적이며, 민주적이고, 성희롱은 생각도 할 수 없으며 인사평가는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속에 숨겨진 평행세계의 회사는 다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공정한 인사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인사철마다 생기는 알 수 없는 결과와 주말 골프장 운전기사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금요일 저녁, 평소 손바닥을 비비지 않은 서울 사람을 월요일부터 부산으로 출근시키는 통보의 서늘함에 대해서도. 그런 서늘한 소식은 여기저기 퍼져나가며 사람들의 목덜미를 스윽 스친다.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회식에 끌려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술잔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든다.
밤마다 거절할 수 없는 술잔을 받아 드는 우리의 노고는 이뿐만이 아니다. 날마다 노사원처럼 부장님의 패션을 칭찬하며 약삭빠르게 비위를 맞춰야하고. 박 차장처럼 구시렁거리면서도 명절에 부장님 댁 부엌에서 앞치마를 멘다. 정대리처럼 일이 없어도 회사에서 쪽잠을 자며 충성심을 보일때도 있다. 하사원처럼 넉살 좋게 부장님을 존경하는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정 과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