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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매달려 있을 수 있겠어? 1

1. 아직도 무한도전을 봅니다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할 일이 많다.


우선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튼다. 장갑 낀 손으로 모자를 눌러

쓴다. 쪼그려 앉아서 무릎 보호대를 감는다. 가방에 작은 덤벨들

을 담아 앞으로 메고 큰 덤벨은 양손에 든다. 준비를 끝내면 지하

1층으로 내려간다.


체육관에 가기 힘든 날은 이런 것들을 준비해서 아파트 계단을

오른다. 대략 20kg 정도를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는데 심폐 지구

력과 코어 및 하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하고 나면 숨차

고 허리 아프고 다리가 후들거리니까 거기가 운동이 된다 싶은

거지. 진짜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계단 오르기는 지금 사는 전셋집이 꼭대기 층이라 시작했다. 계

단 끝에 집이 있으니 운동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씻을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이 집의 장점은 그 밖에도 많은데 일단 층간

소음과 벌레가 없고 환기가 잘된다. 그리고 날아가는 새들의 등

을 볼 수 있다. 가끔 새들이 낮게 날면 새들의 등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그게 너무 신기했다. 세상에, 새들의 등을 내려다볼 수 있

는 집이라니. 7년 전 서울에서 살던 집은 지금 전셋집보다도 비쌌

는데 창문 밖 풍경은 비교도 안 된다. 서울 집의 낡은 창문을 열

면 출처를 알 수 없는 뒤엉킨 전선들과 고추장 색깔 벽돌로 꽉 차

있었다. 멀쩡하던 가슴도 갑갑해질 지경이라 환기할 때는 차라리

현관문을 열곤 했다.


보통 한 번에 100층 정도를 오른다. 우리 집은 20층이니까 지하

주차장에서 집까지 5번 오르면 된다. 내려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쉬는데 중간중간 멈출 때마다 얼마나 기쁜지. 조금 더 쉬

려고 닫힘 버튼도 누르지 않는다.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딩동!’

하고 멈추면 속으로만 ‘앗싸!’ 하고 외친다. 육성으로 외쳤다가 타

려던 이웃을 깜짝 놀라게 한 뒤로 조심하고 있다. 그 이웃은 엘리

베이터를 타려다가 물러났다. 이해해요. 나라도 문이 열렸는데

웬 땀을 뚝뚝 흘리며 덤벨을 든 사람이 앗싸! 하면 타기 싫을 거예

요. 이 자릴 빌려 다시 사과드립니다. 죄송해요. 그 후로는 내려갈

때 사람이 타면 엘리베이터 구석에 최대한 쭈그리고 있는 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 아파트는 시골에 있어서 계단에는 세발자전거부터 감자

상자, 고춧대, 비료 포대, 신문 더미 등이 층마다 벽에 기대어 쌓

여있다. 그럼 반대편인 난간이 있는 쪽으로 올라가야겠다 싶겠지

만, 모르시는 말씀! 나는 계단을 올라갈 때 왼쪽 난간이 아니라 오

른쪽 벽에 붙어서 오른다. 팔꿈치나 덤벨이 벽에 닿을 정도로 최

대한 바깥으로.


난간 쪽에 붙어서 올라가면 회전 반경이 작아져서 왼쪽 발목이

아프기 쉽다. 벽에 붙어서 오르면 발목에 무리도 없고 한 층당 대

여섯 걸음을 더 걸을 수 있다. 이렇게 계단 오르기에 대해 자세하

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내가 이걸 좋아서 하는 줄 안다. 그것

도 모르시는 말씀! 단단히 착각한 거다.


계단 오르기도 내가 먹고살려고 하는 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

다. 매번 하기 싫어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층수가 보이면 일부러

눈을 돌린다. 층수를 세면서 오르면 더 힘드니까. 근데 신기하게

도 참고 참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고개를 들면 맨날 9층이

다. 더 못할 것 같은데 절반은커녕 아직 91층이나 남아있다. 마치

월요일에 출근해서 꾹꾹 참다가 시계를 슬쩍 봤더니 아직도 9시

55분인 느낌. 그때부터는 더 하기 싫어진다. 이어폰 볼륨을 올리

고 본격적으로 땀을 쏟는 것도 그때부터다.


정신없이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땀이 허벅지를 타고 흘

러내려서 양말까지 축축해진다. 어깨와 허리가 뻐근하고 계단 경

사는 괜히 점점 더 높아지는 것 같다. 그때쯤이면 매번 화가 치밀

고 이런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도 하기 싫은 걸 해야 하고, 집에서도 하기 싫은 걸 해

야 하다니. 누구야, 삶을 이렇게 설계한 놈이? 누군가 삶은 여행

이라고 했다는데. 이제 난 못 버티겠어. 삶이 진짜 여행이라면 좀

평탄한 길도 나오고 해야지! 어떻게 참고 버틸수록 길이 가팔라

지는 거야? 내 앞에 놓인 길만 그래? 이제 난 하루하루가 비탈길

을 올라가는 게 아니라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아!’


평소보다 유난히 더 힘들던 날. 노래를 들어도 힘이 나질 않았

다. 지하 1층 계단을 다섯 번째로 밟기 전에 유튜브에서 <무한도

전> 스키 점프대 편을 틀었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영상 속에 형들은 여전했다. 나는 못 본 사이 꽤 나이를

먹었는데.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들리자 괜히 여럿이 함께 오르는

것 같아서 힘이 났다. 손가락을 쭉 움직여 영상을 후반부터 재생

시켰다. 사실 어디서 재생시켜도 상관없다. 이미 내용은 다 알고

있으니까.


스키 점프대에 오르는 미션에서 뒤처져있던 명수 형, 준하 형이

멤버들의 도움으로 정상에 오른다. 이제 길이 형만 남은 상황. 줄

끝에 매달린 재석이 형이 점프대 중간쯤 온 길이 형 쪽으로 발을

쭉 뻗는다. 닿질 않는다. 길이 형이 네댓 걸음은 더 올라와야 한

다. 그렇지만 길이 형은 이미 너무 많이 미끄러졌다. 너무 많이 미

끄러진 사람은 어느 순간 일어날 수 없게 된다. 길이 형은 할 수

있다고 외치는 멤버들에게 대꾸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약해져 있

다. 미안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길이 형은 포기하고 싶지만,

손을 놓을 수도 없다. 그저 스키 점프대에 박아 넣은 아이스 픽에

간신히 매달려 바들바들 떨 뿐이다.


그때 재석이 형이 묻는다. ‘너 매달려 있을 수 있겠어?’ 길이 형

은 대답을 못 했지만 재석이 형은 재차 묻는다. ‘너 매달려 있을

수 있겠어? 확실히 이야기해봐, 너 매달려 있을 수 있지?’ 길이 형

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석이 형이 이야기한다. ‘조금만 매달려 있

어. 형이 내려갔다 올게.’ 그리고 줄을 놓고 스키 점프대 아래로

내려간다. 완전히 바닥까지 다시 내려온 재석이 형은 몸을 추슬

러 다시 길이 형이 있는 곳까지 올라와 말한다.


‘다 왔는데 포기하기 너무 아깝잖아.’


재석이 형이 밑에서 발판이 되어 길이 형을 밀어 올린다. 이제

길이 형은 줄 끝에 거의 닿을 것 같다. 그렇지만 손을 뻗어서 잡기

에는 아직도 줄이 조금 모자라다. 재석이 형이 다시 줄에 매달려

줄 대신 발을 뻗고 자기 발을 잡고 올라오라고 길이 형에게 소리

친다. 길이 형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그러다 형까지 미끄러진다

며 손을 뻗지 못한다. 계속 주저하는 길이 형에게 재석이 형이 소

리친다.


‘너 왜 이렇게 사람 못 믿어!’


잠시 헉헉대는 숨소리만 들리다 결국 길이 형이 재석이 형의 발

을 잡고 올라간다. 나란히 줄 끝을 잡은 두 사람은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마침내 나란히 스키 점프대 정상에 오른다.


재석이 형이 매달려 있을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젠 도

저히 못 버티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앞에 남은 계단도 까마

득했고 준비할 틈 없이 코앞에 디밀어지는 삶들도 내겐 너무 가

팔랐다.


‘두꺼운 고지서, 얇은 적금, 받을 날이 있을지 의심스러운 보험

료, 아버지의 두 번째 수술, 끝나기가 무섭게 생기는 약속들, 떠넘

겨진 업무, 마시기 싫은 술, 맞장구치기 싫은 농담에 억지로 웃는

시간들.’


이런 것들이 하루하루 쌓일수록 내 삶의 비탈길은 점점 가팔라

졌다. 비탈길이 가팔라지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웃게

하는 것들은 저 멀리 굴러내려 갔다. 그동안 아무도 내게 매달려

있을 수 있겠냐고 묻지 않았다. 다들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

다고 생각해서일까. 하긴 각자 버티는 것 빼고 뭐 뾰족한 방법이

있으랴. 주변에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지만 이런 이야길 술자리에

서 했다간 술맛 떨어진다는 소릴 듣기 십상이다.


‘다들 힘들게 버티고 있잖아, 징징거리지 마! 바보짓 하지 마! 허

무맹랑한 소리 하지 마! 네가 힘들 때 누가 도와줄 거 같아? 천만

에, 등 뒤에 칼이나 꽂지 않으면 다행이야. 너 혼자 이겨내야지.

못 버티겠으면 비켜. 손 딱 놔. 너 자리에 들어올 사람 줄 섰어. 뭐

손 놓으면 넌 끝장이겠지만.’


세상은 이런 무서운 말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나는 <무한도전>을

사랑했다. 차갑고 서글픈 말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하곤

했으니까.


‘조금만 매달려 있어, 형이 내려갔다 올게.’


재석이 형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눈보라를 일으킬 정도로 빠르

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묵묵히 다시 올라와 길이 형 옆에

섰다. 너무 많이 미끄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없지만, 나를 위

해 기꺼이 옆에 와준 사람이 손을 내밀면 기적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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