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구사 Dec 14. 2020

매달려 있을 수 있겠어? 2

1. 아직도 무한도전을 봅니다.

동생이 최종 불합격했던 봄. 동생은 수화기 너머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로 울었다. 춘천에서 평창까지는 120km가

떨어져 있었지만 나까지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옆에서 지

켜본 동생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기에 당연히 붙을 거라고

믿었는데. 충격이었다.


우리 남매는 같은 직렬의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내가 먼저

회사에 다니던 동생을 꼬셨다. 내가 얼른 합격해서 도와줄 테니

같이 해보자고. 내가 2년 앞서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동생은 내

책과 문제집, 암기 노트와 볼펜까지 물려받았다. 동생은 그걸 한

자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흡수했다. 그렇지만 합격선은 불과 2년

사이 5점 이상 올라서 내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점수까지 갔

다. 내가 받아본 적 없는 점수는 내가 공부한 방법으로는 닿을 수

없었다.


동생은 울고 있었지만 나는 더 조언해줄 게 없었다. 이대로 포

기해야 하나. 우리는 이제 삼십 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다. 내년에

는 점수가 더 오를 것이다. 긴 수험생활은 삶을 갈수록 가파르게

만들고 나중에는 벼랑이 된다. 거의 다 왔다 싶었을 때 미끄러진

동생은 다시 올라가기는커녕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동생을 다시 일으켜 세울 방법은 몰랐다. 그렇지만 최소한 내가

그 옆에 있어야 한다는 건 알았다. 내가 이미 합격을 했건 직장을

다니건 상관없었다. 사무실과 동생 집이 한 시간 반 떨어져 있어

도, 어리바리한 신입이라며 상사가 끔찍하게 괴롭혀도, 익숙하지

않은 업무에 매일 실수하고 매일 내가 싫어져도. 나도 다시 수험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동생이 지금 일어나지 못한다면, 하다못

해 옆에는 있어 줘야 했다. 다시 일어날 때 나를 붙잡고 일어날 수

있도록. 그게 1년이든 2년이든 간에.


곧바로 춘천에 동생과 살 집을 얻었다. 관사 생활하던 평창에서

춘천까지 수시로 왕복했다. 늦은 밤에는 동생의 가방을 뺏어 들

고 집까지 함께 걸었다. 같이 과일을 깎아 먹고, 발등에 햇볕을 쬐

고, 구봉산에서 야경을 봤다. 오래된 의자가 있는 카페에 앉아서

더 오래된 음악을 들었다.


동생은 다시 펜을 잡았지만 여전히 내 조언은 필요 없었다. 내

가 받아본 적 없는 점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힘으로 일

어선 동생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공부했다. 울음을 참아가며 공부

하던 나와 달랐다. 동생은 도서관이든 식당이든 울음이 터지면

울면서 공부하고 밥을 먹었다. 언젠가 길에서 엉엉 울면서 노트

를 보며 걷는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다면 그건 내 동생일지도 모

른다. 동생은 매일 밤 자기 전에 그날 공부한 내용을 녹음하기도

했다.


‘여기 중요한 부분이니까 기억해. 이건 머릿속에 그림을 떠올

려.’ 하며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걸 녹음했다. 가끔 이상한 노래

를 부르기도 했다. 음은 분명히 ‘학교 종이 땡땡땡’인데 가사가 특

이했다. ‘호광성 상추 담배 우엉 차조기 금어초 피튜니아 뽕나무

샐러’. 나중에 물어보니 빛을 좋아하는 채소들의 종류라고 했다.

동생이 샤워할 때면 문밖으로 물소리 대신 채소들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동생은 눈이 글자를 보고 있지 않을 때면 어디서나 녹음

한 걸 들었다. 하도 들어서 시험 직전에는 동생의 귀에서 진물이

나왔다.


그리고 같은 해 겨울. 동생은 평균 100점으로 7급에 합격했다.


살면서 우리는 재석이 형이 되기도, 길이 형이 되기도 한다. 손

을 내밀거나 잡기도 하고 쓰러진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거나 기대

어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스키 점프대 특집을 처음 봤을 때 우리

는 서로를 보듬어가며 삶의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는 것을 배웠

다. 그리고 정말 몸살 나게 재석이 형처럼 되고 싶었다. 나도 누군

가에게 저렇게 듬직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삶의 벼랑 끝에 간신

히 매달린 동생을 앞에 두고 ‘다들 힘든데 징징거리지 마. 나도 힘

들어’ 같은 소릴 하는 사람은 되기 싫었다.


그래서 손을 뻗었고 기적이 일어났다.


형들은 모두 스키 점프대에 올라가고 영상은 끝났지만 내 앞에

는 가파른 계단이 남아있었다. 내일도 모레도 언제나 그럴 것이

다. 뭐 어쩌겠는가. 오르는 수밖에. 그렇지만 다리는 훨씬 가벼워

진 느낌이다. 삶의 비탈길에 매달린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일어

서는 모습은 여러 번 봐도 좋다.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힘

이 난다.


그래. 나는 이 맛에 아직도 무한도전을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달려 있을 수 있겠어?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