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은 엄청난 버팀목이야.
"이대로만 하면 되는 거겠지?"
이민을 결심했을 당시 가장 쉽고 빠르게 영주권을 딸 수 있는 방법은 요리와 미용 직종이었다. 돌이켜보면 요리를 했으면 좋았을걸. 왜 그랬는지 나는 미용을 택했다. 결혼을 한 여자에게 요리보다 미용이 수월할 거라는 안일한 착각 때문이었다. 첫 수업날에는 나같이 영주권을 목적으로 학교에 온 학생들이 많았다. 수십 명의 학생들 중 진짜 미용사가 되기 위해 온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학기가 지나 지날수록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업을 대충 때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목적은 영주권이었지만 열심히 모은 돈으로 들어간 학교에서 그저 졸업장만 사가지고 나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각 한번 하지 않았고 실력이 좋아 선생님들께 늘 사랑받았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서 영어과외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영어시험공부를 했다. 하루 24시간을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였다. 그냥 다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그마저도 행복하다고 여기며 나의 선택에 최선을 다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미용을 배우는 학생들이 출품하는 콘테스트에서 1등도 해보고 그 때문에 지역 신문에도 나게 되었다. 늘 최선을 다하는 학생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가장 빨리 일자리도 구할 수 있었다. 졸업을 하지 않은, 그것도 한 학기만 마친 학생이 호주 현지 미용실에 취직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낮은 시급을 받거나 오히려 돈을 내고 경력인증을 위해 미용실을 다닐 때 나는 당당히 현지인과 동일한 시급을 받으며 비교적 편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녔고 남들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경력인증도 빠르고 쉽게 해내고 있었다. 4개월에 한 번씩 내는 학비도 미용실 월급과 과외아르바이트로 충당이 가능했다. 틈날 때마다 영어시험공부도 했다. 열심히만 하면 2년 과정의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영주권신청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만으로 스물다섯이라는 꽃다운나이가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에너지와 체력을 뒷받침까지 해주고 있었다. 영주권이라는 목표를 향해 순풍에 돗을 달고 항해하는 배처럼 나아가던 나는 뜻밖의 현실에 부딪히게 되었다. 1학년 2학기의 중간정도가 흘렀을 때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한 두줄을 보게 된 것이다.
"엄마가 되어도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까?"
신기한 만큼 두려웠고 감사한 만큼 후회도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경력인증을 마치고 나서 아이를 가졌어도 늦지 않았을 텐데. 후회하기엔 이미 아이가 내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중이었다. 홀몸으로도 하루하루 보내는 시간이 버거웠는데 임신한 몸으로 해낼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5월은 2학년 1학기, 8개월을 더 다녀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가족이나 지인 하나 없는 호주땅에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도 어려운데 학업에 경력에 영주권준비까지 다 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아무리 영주권이 중요해도 뱃속의 생명보다 중요할리가 없었다. 결국 아이는 태어나는 거고 잠시 학업을 중단하느냐 그냥 계속하느냐의 문제였다. 결정은 쉬웠다. 나는 둘째치고 아이만은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목표를 그냥 빠르게 완수하는 것뿐이었다.
'간절함 이 생기면 버티기 수월할 거야.'
결국 하던걸 계속하겠다고 결심을 한 나에게 호주라는 땅이 간절함이라는 큰 버팀목을 선물해 준 것만도 같았다. 아이가 계획에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생각하며 버틸 수 있게 말이다. 생명의 탄생을 경외시 하는 호주에서 나의 임신은 어디서든 축하받았다.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데리고 와서 수업을 들어도 된다고 했고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돌봐주겠다고 힘을 주었다. 다니던 미용실에서도 출산 막바지까지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해도 좋다며 흔쾌히 임산부 직원을 배려해 주었다. 나의 임신에 힘들어했던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축복화 함께 시작한 나의 첫 임신은 영주권이라는 목표와 나란히 순항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몰랐다. 진짜 버팀목이 필요했던 순간은 아이가 태어난 이후였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