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가 16년 전, 내가 26살인 해였다. 어린나이가 주는 자신감이었을까? 날치기 법안처럼 통과된 가족계획사업은 금세 실현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예상 밖이었다. 한두 달은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하지만 임신테스트기의 한 줄을 확인하는 달이 반복되다 보니괜스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내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남편이? 혹시 내가 불임일까? 병원에라도 가보아야 하는 걸까? 아마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결혼 후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던 임신은 사실 아무에게나 쉽게 오지 않는 엄청난 행운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엄마가 되는 기회를 선물 받게 된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렇게 많은 축하를 해주나 보다.
첫아이는 결국 열 달의 기다림 끝에 만나게되었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임신 준비라는 자체를 하지도 않고 아이를 가질 시도를 했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준비물을 놓고 와서 엄마가 가져다주기 일쑤였고 대학생 때도 전공서적 없이 수업에 들어갔던 적이 많았다. 돌이켜보니 "애가 왜 이렇게 준비성이 없어?"라는 말을 집이나 학교에서 꽤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대책이 없는 나는 그렇다 쳐도 가족이나 친척, 친구 하나 없이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호주땅에서 아이를 갖기에는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흔한 산전검사도 받아본 적이 없고 풍진 예방접종도 둘째를 계획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준비성이 결여된 나라는 사람에게 첫아이가 늦게 찾아온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임신 시도에 몇번 실패한후 불임의 원인을 찾아보면서 나도 자연스레 임신 준비라는 걸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물론 전문성은 조금 결여되었었지만 말이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에 병원은 사치였으니까. 한국의 가족들에게 물어보고 인터넷을 뒤적여가며 혼자서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았다.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를 처음 하게 된 순간이었다.
엄마는 몸이 따뜻해야 한다고 얼른 한의원에 가서 약부터 지어먹으라고 하셨다. 평소 내가 손발이 차고 생리 때마다 고생했던걸 아셨기 때문이다. 엄마의 조언대로 양말을 늘 신고 다니고 배가 드러나는 옷이나 치마는 멀리하고 따뜻한 물을 자주 마셨다. 가급적 좋은 음식들을 먹으려 노력하고 산책과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면서 몸이 아기를 맞이하기에 충분히 건강해지기를 바랬다. 이렇게 엄마 말을 순순히 잘 들었던 때가 또 있었을까? 그래도 행운의 여신은 자꾸만 나를 피해 갔다. 결국 시드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돈이 드는곳이다보니 혼자하는 방법이 먹히지 않으면 차선책으로 쓸 참이었다. 한의사 선생님은 아니나 다를까 자궁이 차고 어혈이 많다고 하셨다. 직접 다려서 먹는 약을 조제해주는 한의원이었기에 몇 번이나 태워가면서도 매일 두 번씩 꼬박꼬박 한약을 달여먹었다. 이렇게 해도 임신이 1년 넘게 자연적으로 되지 않으면 병원도 갈 참이었다. 학생비자 신분으로 병원을 가는 건 너무 큰 비용이 들어가다 보니 이렇게 최후의 수단으로 미뤘었다. 이러한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결국 그렇게나 바라던 임신을 하게 되었고 처음 두줄을 본 그날 새벽 나는 펑펑 울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위해 진심을 다해 본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아니, 어찌 보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와 대학에 입학을 할 때도, 입사시험을 볼 때도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그 어떤 때보다 순수하고 간절했던 것 같다. 이런 마음가짐을 살면서 다시 한번 가질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이 될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그 순수한 마음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예뻐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준비들이 되어있지 않았었다. 여행을 갈 결심만 했지 가서 무엇을 할지 계획도 없고 현지에서 쓸 돈도 없는 상황과 비슷했다.
먼저 아이를 낳고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저지르면 해결되겠지 하는 생활태도로 그동안의 인생을 살아왔었고 자녀계획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지금 나는 체력 못지않게 정신력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가장 중요한 마음의 근육을 전혀 키우지 않고 있었다. 이해, 배려, 인내, 진정한 사랑과 같은 육아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전술들을 말이다. 육아전쟁에 대비해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미리 예상하며 완전무장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모든 부모가 아마 마찬가지일것이다. 하지만 준비를 한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준비없이 적을 맞닥들이는 상황보다는 상대의 전술을 예상하고 대비하는편이 훨씬 나을테니까. 더욱이 나는 함께 아이를 키울 전우에 대한 믿음도 없었고 함께 싸우는법을 전혀 몰랐다. 항복 자체가 받아들여지지않는 끝도없는 전시상황에서 나는 무너지고 다치고 상처받기 일쑤였다.
경제적인 준비 또한 없었다. 사실 나는 몸과 마음의 준비보다 경제적인 준비가 제일 부족했다. 당연히 집도 차도 없었거니와 호주 의료시스템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병원을 다닐 능력 자체가 되지 않았었다. 사회생활 초반에 호주로 이민을 온 터라 모아놓은 돈도 없었고 스무 살 이후 번 돈은 대부분 어려웠던 친정 살림에 보태야만 했다. 누가봐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 속에 내 아이의 인생을 동참시키는 순간이었다. 결국 아이까지 가난으로 힘들게 할 때는 정말 가슴이 찢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아이가 아픈데 병원비 걱정부터 하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룬 지금은 당시의 상황이 젊은시절 추억쯤으로 여겨져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도 당시처럼 힘든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보고는 한다. 흔히들 말하는 흑수저를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물려주면서 아파할 내모습에 오싹하기까지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맨땅에 헤딩하듯 엄마가 된 나에게 찾아온 네 명의 아이들은 잘 크고 있다.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면 나의 엄마 인생길이 조금 덜 수고스러웠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대로 공부도 안 하고 시험을 봤는데 기대 이상의 점수를 받은 게 이런 기분일까? 15년 차 엄마인 지금의 나는 마음의 크기와 경제적인 여유 모두 스물여섯 살의 그때보다는 훨씬 나아져있다. 다시 그때의 젊음을 준다 해도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말이다. 경험이 쌓이며 생긴 노련함도 육아의 강도를 낮춰주는데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체력은 예전 같지 않지만 튼튼해진 정신력이 잘 지탱해주고 있다. 준비도없이 엄마가 되었지만 나의 선택에 책임지기위해 최선을 다했고 다행이 더 나은 인생을 만들 수 있었다. 육아를통해 삶을 대하는 자세 자체도 바뀌었다. 나의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미리 걱정부터 하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진취적으로 추진하며 최선을 다하려한다. 물론 예전에는 부족했던 준비성도 지금은 어느정도 생겼다. 노력해서 인생을 내편으로 만드는것, 분명 엄마가 되어서 배운 삶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