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90s
감독 조나 힐의 성장기는 힙합과 스케이트보드였다. 그에게 있어서 <mid90s>는 그 시절을 향한 헌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속 스티비의 일탈을 보는 이들은 그 시절 여름날의 사춘기를 반추한다. 언제부턴가 옷 태를 신경 쓰고, 몸 구석구석 굵은 털이 자라기 시작한다. 괜히 학교 복도에서 좋아하는 여자애를 마주치면 애써 무관심한 척 더 짓궂어지는 때. '그런 시절이 있었지'하며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젓는다.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스케이트 용품점에서 스티비는 레이, 존나네, 4학년, 루벤을 만난다. 거리에서 위험하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시시콜콜 농담 따먹기나 하는 그들의 모습이 스티비에게는 쿨해 보이기만 한다.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 장만한 싸구려 스케이트 보드, 이와 맞바꾼 우정은 일탈로 무늬진 스티비의 그 시절 LA에서의 여름이었다.
형들이 하는 건 다 멋져 보일 때가 있다. 괜시리 왜곡된 소속감에 속없는 의미를 부여하고선 멋있어 보이는 건 다 따라 해보고 싶은 시기를 겪으며 소년은 남자로 거듭나는 걸까? 모종의 방황을 거치며 성장하는 것이 사람 사는 거 아니겠냐며 어린 날의 탈선을 합리화하는 나의 지난 청소년기에도 분명 사춘기는 있었다.
성장은 다양한 형태로 삶에 녹아든다. 걸음마를 떼고 입 밖으로 '엄마', '아빠'를 내뱉는 순간부터 처음 시원하게 육두문자를 외쳤을 때의 알 수 없는 해방감. 학교에 모셔온 부모님과 아들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담배갑. '좋아해'라고 용기내는 순간과 별안간 들려오는 '미안해'. 전화기 너머 부모님께 '사랑해요' 말하는 마음과 집 떠나온 청춘의 헛헛함. 지나온 과거의 무색함과 이어질 미래의 지난함. 삶은 언제나 점이 아닌 선으로 그려지며, 시간은 수직이 아닌 곡선으로 흐른다. 그 시절의 방황은 낭만이었을지, 철없는 일탈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순간은 찰나에 머물러있다. 모양과 색깔이 어찌 되었든 주어진 오늘은 변함없이 어제로 향한다.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에 질문한다. 삶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 물음에 답하며 우악스럽게 매일매일을 살아가다 문득, 잊었던 그 시절의 향수가 계절을 타고 코끝으로 전해진다.
스티비는 스케이트 보드 무리에서 '땡볕(sun burn)'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바짓가랑이를 축 늘이고 뜨거운 아스팔트에 바퀴를 굴리며 발끝을 부딪힌다. 친구들을 따라 파티를 찾아다니며 여자와 시시덕거리고 병째로 술을 들이켠다. 말보로를 주머니에 꽂아 넣고 언제든 입에 물고선 불을 붙인다. 다들 진탕 취해 존나네의 차에 몸을 싣고 또 다른 파티로 향하던 어느 밤. 빈 정신에 차를 꼬라박고 스티비가 크게 다친 밤. 수술 끝에 깨어난 스티비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주스 두 개를 꺼내는 형 이안. 병원 로비 소파에 잠이 든 채로 스티비의 곁을 지킨 4명의 친구들.
옆에 누가 있는 건 정말 좋더라
스티비가 기억한 계절, 언제였는지 희미한 90년대의 어느 여름은, 땡볕에 그을린 피부처럼 쓰라리지만 곧 흔적만 남긴 채로 아무렇지 않게 될,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성장통이었을 거다. 16mm 필름 안에 담긴 사춘기였을 거다. 조나 힐의 추억 속 mid 90s였을 거다. 내가 떠올린 어린 날이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