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놀놀일>
많은 사람들이 워라밸을 외치는 사이 일이 곧 놀이고 놀이가 곧 일이라고 목소리를 키워가는 이들이 있다. 마케터 김규림과 이승희는 재미를 추종하며 일과 놀이의 경계를 허물어간다. 이 책은 일인 듯 놀이인 듯 그 모호한 경계의 것을, 그와 연결된 다양한 주제와 생각들을 그들만의 문장으로 풀어낸 책이다.
멀리서 동경만 하던 것이 어느새 내 일상으로 녹아들었음을 깨달을 때.
"누구도 우리 대신 배울 수 없다. 누구도 우이를 위해 성장할 수 없다. 누구도 우리 대신 찾으러 나설 수 없다. 누구도 우리 대신할 일을 할 수 없다. 존재는 대체될 수 없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전문의 호르헤 부케이가 한 말이다. 그는 '나는 나의 성장과정을 책임질 의무를 가진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나는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내 성장에 자극을 주는 주변 존재들과 내가 더불어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라는 영향력 안에 연결되어있어 누군가 성장하면 시너지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역시 성장해야겠다.
나의 동경도 언젠가는 일상이 되기까지, 함께 커갈 수 있는 우리가 될 때까지 성장, 꾸준함의 자극을 잃지 말아야겠다.
그렇다. 시간은 '어쨌든' 흐른다.
내가 뭔가를 했든, 하지 않든.
그리고 흐르는 시간에서 내가 한 선택들은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시작이라는 씨앗을 부지런히 뿌리는 것이 아닐까?
시간은 그게 무엇이든 싹을 틔워줄 테니 말이다.
더 많이 경험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시간을 알차게 쪼개어 무엇을 할지, 했는지를 남긴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지만 기회를 준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늘 새로운 시간을 주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선물한다. 시간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결국 나는 시간 덕분에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고, 더 좋은 시간을 만들어간다. 시간은 가차 없어 보여도 품이 넓다. 불완전한 모든 것을 품고 흘러간다. 그러니 힘을 빼고 시간의 흐름에 올라타 보자. 미래에 당신이 되어 있을 다양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것을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지금 주어진 현재의 시간에 발을 잘 딛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온 시간은 우리의 삶에서 쉽게 휘발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은 일종의 걸어온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지 않을까. 서랍에 물건을 정리하듯 지나온 시간을 정리해서 둘 서랍 같은 게 필요하다. 어쩌면 기록은 내가 소비한 시간의 영수증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일을 하다가 '일놀놀일'의 기운이 올 때면 일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가 일을 끌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평생 일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최소 8만 시간이라고 한다. 그 시간 동안 행복하지 않으면 인생의 절반은 행복하지 않다고 봐도 무방한 건 아닐까. 이제는 워라밸이 아니라 일놀놀일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셋이 정말 비슷하게도 생겼네
30년 넘게 사전을 만든 작가 안상순은 <우리말 어감사전>에서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시선의 향방에 있다고 말한다. 자존심의 시선은 '나의 밖'을 향하고 있고, 자존감의 시선은 '나의 안'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자존심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 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자존감은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하다. 즉, 자기 긍정이 타인의 평가에 기대어있는 게 자존심이라면 오로지 스스로에 대한 평가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존감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한마디에 쉽게 무너져 내리는 나의 자존감은 어디에 있는 걸까? 있기는 한 걸까?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 남들의 시선을 투영하여 보는 대신 내가 나를 온전히 보는 연습을 거듭해야 자괴감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자존감보다 자존심과 자괴감이 더 컸던 나는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를 투영해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과 사람들을 투영해 나를 바라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나의 시선은 나의 안을 향하는 자존감일까? 아니면 나의 밖을 향하는 자존심일까? 스스로 돌아보지 못하면 나를 보살필 수 없다. 항상 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다. 딴 눈 팔지 말고 나에게 집중해봐야겠다.
오히려 어른에게 더 필요한 질문,
"장래희망이 뭐예요?"
아는 것도 많아지고, 하는 일도 많아지고, 보는 세상도 넓어지는데 내 꿈만 작아지는 것만 같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어렸을 적에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질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답보다는 핑곗거리만 늘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을 살아야 하는 우리네 삶에 장래희망은 사치일 수 있지만, 본인이 원하는 삶과 비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함구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지 않을까? 나를 나로서 실현하는 것이다. 농도 짙은 사람으로 말이다.
병원 코디네이터에서 마케터로 방향을 바꾼 후에도 일을 못한다고 혼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다. 왜 하늘은 나에게 일을 잘하는 재능마저 주지 않은 것일까. 일하는 센스를 길러보려고 매일 물어보고 적고 주말마다 배우러 다니고 책을 읽었다. 나의 '재능 없음'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뭐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잘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무척 절망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니까 재능에 기대지 않고 하루하루 노력해나갔다.
하지만 ' 재능 없음'에도 재주는 있다. 정말이다. 진짜다. 일을 잘하고 싶어서 무조건 받아 적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나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재능이 없어서 시작한 것들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가진 게 없음을 인정한 뒤에야 나는 성장했다. 얕은 재능에 기대어 사는 삶보다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이것저것 해보는 삶이 나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날 때부터 팬과 노트를 손에 쥐며 살아온 줄로만 알았지만, 그녀 역시 필사적인 자기 연단의 시간을 겪었다. 꽤나 놀라운 사실이면서도 당연한 일이라고 단념했다. 누군가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결국엔 누구나 물 위를 헤엄치는 백조다.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재미는 지금껏 내 인생을 끌어준 구체적인 방향이었다.
글을 쓰는 이유는 참 많다.
하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삶의 궤적이 남겨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면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일종의 진단서 같다. 이전에 써둔 글을 읽어보면 그때 내 마음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글이라는 건 어찌 됐든 내 마음의 무언가를 토해내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일매일의 나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동시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산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누군가의 삶은 기록했다는 이유로 영원히 남지만, 기록하지 않은 삶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가 집착하듯 기록하는 이유는 단 하나. 휘발되어버린 것이 '두렵고 억울해서'다.
어떤 형태로든 내 삶의 족적이 남아 있단 안도감과 쌓여갈수록 나를 닮아가는 기록물들이 언젠가는 나보다도 커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오늘도 기꺼이 기록물을 이어간다.
기록하는 행위에 꾸준함이 붙은 시점부터 휘발되는 감정과 순간에 대한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매일을 기록하면서 스스로에게 받은 선물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누가 봐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세워 보여줄 것도 아니지만, 이왕이면 내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다.
나도 모르는 새 시나브로 쌓이고 있던 나.
내가 읽은 책이 쌓여 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책들과의 우연한 만남들이 좀 더 특별히 느껴진다.
서점 매대에서 발견한 책, 선물 받은 책 등, 책은 매 순간 삶 속으로 들어온다.
읽다 접은 책 한 귀퉁이, 시선을 떼지 못해 밑줄 쳐둔 문장들.
이런 것들이 쌓여 내 삶이 된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이다.
어떤 책들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통로가 되고, 또 어떤 책들은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되기도 한다.
책과 글쓰기는 호흡처럼 이어가는, 없으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중요한 습관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자. 내가 걸어온 길이 내가 읽은 책으로 포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때론 어떤 소비로 인해 일어나기도 한다. 침대를 바꾸었더니 잠의 질이 좋아졌다거나 테이블을 바꾸었더니 함께 사는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처럼. 나는 그 테이블을 사며 내가 바라는 라이프 스타일도 함께 산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비하인드 씬과 누군가의 하이라이트 씬을 비교한다."
역경을 딛고 드라마틱하게 성공하는 스토리는 어쩌면 편집된 하이라이트 일지 모른다. 편집되지 않은 삶의 언본에는 다 담기 어려울 만큼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나는 또 누군가의 화려한 편집본을 보며 부러워할 것이다. 아, 가끔은 누가 내 인생 좀 편집해줬으면 좋겠다 하면서. 3개월 만에 영어를 독파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앉은자리에서 책 한 권을 멋지게 써내는 천재적인 작가도 되었다가, 한 달 만에 다이어트는 물론 복근까지 만드는 사람으로 편집되면 어떨까. 오,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절대 누군가가 편집해줄 수 없는 원본 인생에서는 정직한 시간만 흐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에게 멋져 보이려 애쓰거나 무언가를 빠르게 이루려 조급해하지 말고 한 걸음씩 정진하는 것뿐. 원본 자체로 매력 있는 영상처럼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이 편해지는 더 빠른 방법은 편집된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줄여버리는 것이다.
인생은 사진이 아닌 동영상이다. 편집이 안된 원본 동영상이다.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냥 열심히만 하면 안 된다고. 내가 왜 열심히 하고자 하는지 방향성을 잡고 공부를 하면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냥 열심히만 하는 사람은 이상한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도 했다. 나는 어쩌면 영감만 수집하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감도 아는 만큼 받아갈 수 있다. 토양이 척박하면 아무리 좋은 햇빛과 물을 쏟아붓는다 한들 씨앗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더욱더 많이, 양질의 영감을 가져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방향성을 잡고 깊게 공부하며 내 것으로 소화한 영감은 '감각'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일본 츠타야 서점의 CEO 마스다 무네아키는 한 인더뷰에서 감각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감각이라는 건 결국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거든요. 다양한 선택지를 경험해본 사람이 '이것이 좋다'라고 고르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고르는 것은 질이 전혀 다릅니다."
많은 경험은 단연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한 것인지의 방향성 또한 중요하다. 나는 내 삶의 조각들을 어떤 경험으로 쌓아갈 수 있을까? 어떤 선택들을 바르게 해 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