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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Feb 12. 2024

황혼

2월 8일 목


오후 6시 25분, 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채광은 사라지고 건물은 밝아진다. 2월 일몰시간은 6시 11분. 황혼의 공주, 피오나, 해가 지면 살아나는 박물관, 늑대인간 등등. 현실에선 그런 멋진 일들이 일어날 리 없지만 양껏 게을러지기로 마음먹은 날. 해가 나를 비췄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날을 보내면 일몰시간을 따져가며 저무는 하루에 떠내려가는 마음이 퍽 좋다.


적당히 복작복작한 공간들. 소음이었다가 이야기였다가 정적이었다가 음악에 묻히는 소리들. 책을 읽다가 읽는 척을 하다가 길을 잃고선 다시 더듬어 지나온 길을 찾아가는 분열.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세상에 적당히 젖어든다. 튀어나올 뻔한 미소를 마음으로 훔친다.


서로 계산하겠다는 손님 두 명. 두 판의 가위바위보 끝에 내미는 검정 카드. 나란히 앉아 담배를 태우는 우정.


매일같이 지나치는 거리에 항상 보이는 카페. 오늘에서야 미닫이 문 너머로 좁혀진 거리. 그 앞에 정말 오랜만에 마주친 지인. 반가움 속 쉼표 같은 어색한 침묵. 그의 지인들로 깨진 적막과 또 보자는 인사말. 오늘도 팍팍한 가게 사장님들의 푸념. 교회 이야기를 하는 내 또래 같아 보이는 여자 두 명. 힐끗힐끗 눈이 마주치는 대각선 혼자 온 여자. 이내 아까 만난 지인과 다시 한번 어색한 인사. 미닫이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향한다.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 카페.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노트를 펼친다. 지워지는 여백. 한 편에는 연인이 되어가는 남녀. 다른 한편에는 책 읽는 여자. 커피를 내리는 주인과 그녀를 둘러싼 지인들. 내 앞 선반에는 과테말라 커피. 옆에는 후한 인심으로 받은 우롱차. 후미에 올라오는 단 맛. 이내 쌉싸름한 맛. 조금 큰 음악소리. 커피는 마셨지만 마음은 노곤하다.


동화 속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왕자도 아니고 공주는 더더욱 아니며 가슴을 졸이거나 미여오는 사연도 없지만, 황혼에 나를 잃어야 하는 사연도 없지만, 뜨는 해에 비치고 이어진 어둠에 삼켜지지만, 괜한 태를 부리며 하루에 마침표를 찍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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