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깊이
내 동생은 공주다. 나의 삶이 시작되고 두 해가 지나서야 태어난 그녀는 어디서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다. 당연히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또 어느 정도는 객관적인 부분도 다수 존재한다 확신한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부터 세공되지 않은 보석과 같이 그 지위를 누렸다. 둘째가 생겼다는 소식은 내가 ‘아들’에서 ‘첫째’로 바뀌었다는 신분의 변화였다. 물론 두 부모님은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셨다. 지금까지도 아낌없이 부어주는 두 멋쟁이 신사들. 하지만 매 순간 공평하기에는, 인간이라는 생물은 한정된 마음을 가진 선택과 집중의 동물이었다. 선택의 결과가 확연히 드러날 단 두 명의 아이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종합적인 평등을 궁극의 목표로 잡았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탁구를 치듯이, 우리 둘을 번갈아가며 챙기셨다. “다음엔 너 차례야”라든지 “어젠 너한테 줬잖아, 그치?”라는 말은 꼭 빼먹지 않으셨다.
동생은 집 안의 태양이었다. 그리고 태양은 하나뿐이라는 자연의 섭리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외로운 사실이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새벽의 첫 새처럼 가볍고 맑았으며, 모두가 그녀를 위해 아침을 맞이했다. 부모님의 손길은 그녀의 손에 더 오래 머물렀고, 잠에서 깰 때마다 들리던 "우리 공주, 우리 공주"라는 말은, 나에게는 투명한 선 너머로 밀려난 기분을 심어주었다. 어린 시절 우리의 방은 성처럼 꾸며졌지만, 나는 성 바깥에서 하녀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그녀가 넘어져 무릎이 까지기라도 하면 "우리 공주 아프면 어떡해!"라며 걱정 어린 외침을 쏟는 어머니를 보며, 나에게 똑같이 외치던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남에도 얄팍한 질투심은 쌓여만 갔다.
시간이 흘러 둘 다 성인이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집안의 공주다. 그녀가 집에 들어오면 부모님의 눈빛이 반짝이고, 나는 그저 익숙한 무대 뒤에서 조용히 그 순간을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반짝이는 별이고, 나는 별빛 아래 놓인 그림자처럼 익숙하게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가끔, 별빛이 내 어깨에 떨어질 때면 어릴 적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손을 꼭 잡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 그녀를 위해 길을 비워준다. 어쩌면 그것이 첫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내가 그녀를 지켜주고 있다는 이상한 자부심이 피어오른다. 그녀는 공주였고, 나는 공주의 뒤에 선 성벽이었다.
매 번 동생과 부모의 사랑을 논할 때마다 이 차별에 대한 부분은 그녀가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그녀의 시선에서는 내가 이 집안의 왕자였고,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였다. ‘형제는 거울과 같다’하는 말은, 거울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서로를 태양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과 같았다. 그럼에도 의아한 사실은 이러한 상황들에도 두 남매의 사이는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두 아이는 함께 손을 잡은 채 길을 걸었고, 심지어는 단둘이 지하철을 타고 박물관에 함께 간 기억까지 선명히 남아있었다. 마음속 품은 서러움과는 달리 다툼도 적었다. 오히려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력 관계를 도모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부모를 두고 함께 입을 맞춰 시나리오를 짜거나, 귀가 시간을 조절하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나와 동생의 사이가 좋은 편이라는 사실은 다른 남매들을 보며 여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와 함께, 사실은 동생이 나를 위한 배려도 꽤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남매들이 있었다. 물론 원만한 관계의 남매도 있었지만, 반대로 서로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타인의 관계도 존재했다. 대화가 단절된 오빠와 동생도 있는가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남매들도 있었다. 그들은 사막과도 같았고 폭풍과도 같았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사막 끝자락의 호수였고 폭풍 뒤에 뜨는 잔잔한 달빛이었다.
동생의 자리는 그녀가 부재했을 때에도 확연히 느끼게 되었다. 생각보다 그녀의 빈자리는 컸다.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그녀에게 전화 한 통만 하더라도 투덜대긴 하지만 결국에는 사 오는 과자 한 봉지. 또 배는 고프지만 상을 차리기는 귀찮은 인간의 이기심이 극에 달하는 순간에도, 라면을 끓이라는 말 한 마디면 그녀는 단숨에 공주에서 하녀로 스스로를 좌천시켰다. 공주는 나였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편안함의 소중함은 그녀가 없을 때가 되어서야 슬그머니 문을 두드렸다.
인간은 잃어야 있던 것의 소중함을 안다. 주어진 것의 귀중함은 부재한 것의 빈자리가 찬바람으로 공허한 얼굴을 강타할 때가 되어서야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보다 더 이기적인 인간의 실체이다.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된다는 비열한 명제는 그 반대의 경우에도 악마가 비웃듯 거짓말같이 성립한다.
숲 가운데 도시가 생겨나고서부터 도시 속의 숲이 각광받기 시작할 때까지 수많은 숲들이 사라져 왔다. 서울 중앙의 아파트 안에서 숲을 찾고 자연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은 인간의 모순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들 중 하나이다. 전쟁시대에 예술가들을 무시하고 폄하하다 평화가 온 세상에 도래하고 나서야 그들을 귀히 여기는 대중들이나, 자신의 군복무가 다 끝나고 나서야 국방력에 대해 훈계하는 남성들도 그와 같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고 하지만, 지나고 나서도 잊어버리는 존재들도 우리 인간임은 인간이 얼마나 얄팍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봄의 화사한 꽃들에 열광하던 인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기에 걸려 환절기에 대해 논하며 불만을 쏟아낸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나고, 그것이 너다.
나도 그것을 가끔 잊는다. 아니, 종종 잊는다. 마치 손에 든 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고 그것을 자꾸만 흔드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고 나서야 내가 무엇을 했는지 깨닫는 그런 못난 짓을 나는 반복한다. 그녀의 소중함을 더 자주 떠올려야 한다. 내가 그 꽃을 흔들기 전에, 폭풍이 오기 전에, 나는 내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진 이 소중한 관계도 언젠가 내 손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땐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늦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