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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영 Nov 29. 2024

8. I believe

일상의 깊이

 20살이 되던 해, 굶주린 하이에나와 같이 남의 세계를 탐험하는 여행을 꿈꿨다. 3년간 이성과 감성보다는 야성만을 기른 남고 출신의 남성이라면 누구나 이성의 존재를 탐했다. 알아서 연애를 잘만 하던 몇몇 친구들이 부채질을 가했다. 해진 문제집을 핀 후 이를 가는 악역 배우와 같이 펜을 잡고는, 대학에 가게 된다면 사랑을 시작하리라 다짐했다. 그런 거친 욕망이 20살이 된 나의 뇌와 몸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연애에 대한 순수한 갈망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서로 다른 두 우주가 충돌하여 만들어내는 새로운 별빛. 그 빛은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비추는 등대가 된다. 연애는 시간의 틈 사이로 스며드는 영원에 대한 소망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색을 잃지 않는 단풍처럼, 세월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는 순간들을 쌓아가는 일이다. 때로는 열병처럼 뜨겁고, 때로는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다. 그러나 그 어떤 형태로든, 연애는 사랑이라는 신비한 언어로 삶을 시로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는 연금술사의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이 몰래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이 여자친구는 찾아왔다. 나와 동갑이었던 그녀는 내 안에 없었던, 어쩌면 오랫동안 숨죽이며 때를 노리던 맹수와 같은 사랑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새벽녘에 피어오르는 안개와 같았다. 처음에는 땅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기척으로 다가와, 어느새 사방을 감싸는 포근함으로 변했다. 모든 게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도, 그 희미함이 오히려 설렘을 더했다. 마음속에서 꽃봉오리가 움트듯, 낯설지만 아름다운 감정들이 차례로 피어났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 가슴속에서 번지는 떨림은 봄바람이 첫 잎사귀를 어루만지듯 가벼웠지만, 그 울림은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20살은 연애의 나이’라고 하지만 연애에 국한되지 않는, 새로운 만남의 나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새로운 환경과 그 속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이 홍수와 같이 밀고 들어오는 울타리 확장의 시기. 이런 대형 공사는 둘만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연애와는 그다지 맞지 않는 일일 수 있다. 특히나 이 나이에 경험하는 불안과 질투는 갓 태어난 별이 중력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처럼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 감정들 속에서도 스스로를 단단히 세우는 법을 배워가며,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녀도 여러 친구들과 울타리를 공유했다. 그녀의 울타리는 경계가 아니라 연결이었다.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도 문을 활짝 열어주고, 그들이 자신의 작은 울타리를 가져오면 자연스럽게 이어 붙인다. 그녀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서로 다른 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아름다웠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공존이었다. 친구들과의 저녁약속을 들을 때마다 구름 위를 걷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막지는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고 증명 가능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경험으로 도출해 내는 결과를 입력시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증명이 불가능한 것, 확인하지 못하는 것을 실제로 존재하듯, 본 것과도 같이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믿어야지 믿어야지 하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본 전제로 깔 정도의 당연함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디폴트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이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의 당연한 것. 예를 들면 부모가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든가, 내가 걷는 이 길이 갑자기 사라져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괴상하다 여기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생겨날까. 믿어야지 믿어야지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위에서도 언급했다. 그런 직접적인 주입식 믿음은 실제 믿음으로 성장하기에는 많이 어려울 것이다. 믿음은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다.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다가오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강아지가 하루, 이틀, 한 달을 같은 사람과 함께하게 되면 경계를 풀고 먼저 다가가게 되는 것. 믿음은 그런 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렇게 보고 나면 우리는 큰 모순에 빠진다. 우리는 보는 것, 듣는 것, 느끼고 경험하는 것에서부터 믿음을 만들어내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니.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모순을 인정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완전히 믿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완전히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맹신이다. 그러한 것들을 믿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심이 생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바로 이 의심으로 성장한다.


 의심 없는 믿음은 맹신이라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은 나의 인생의 큰 나침반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믿음을 의심하고, 매번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의심을 해결해 나가며 그 믿음을 성장시켜야 한다. 하나의 의심을 해결하면 또 다른 부분에서 의문점이 빠르게 다가온다. 끊임없는 의심으로 우리의 믿음은 유지되며 발전한다.


 나의 연애는 의심 없는 믿음의 말로를 잘 보여주었다.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맹신의 결과는 배신감이었다. 그녀가 잘못을 하지 않아도 추앙하는 이의 부족한 면은 전교 1등이 한 문제를 틀린 것에 오열하듯 큰 잘못처럼 내비쳤다. ’기대‘는 그렇게 의심의 나침반들을 수거해 간다. 그리고 잘못된 길로, 맹신의 길로 빠지게 한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때의 기억들이 머리를 스친다. 확신에 차 그 길을 걸었던 나날들. 경로가 이탈된 것을 인지한 순간. 애지중지했던 믿음이라는 보석이 산산조각 나던 순간.. 영화를 리뷰하듯 찬찬히 다시 그 장면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돌려보아도 분명한 것은, 저녁약속을 허락받던 그녀의 눈망울은 진주와 같았고 깨진 조각들은 영롱히 빛났다는 것이다. 가끔 우리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을 위해 설레는 헛걸음을 하는 것이 아닐까. ’에이, 허탕이네‘ 속으로 외치며 되돌아가는 길은, 내가 떨어트려 놓은 보석들로 빛나는 길로 변모하여 있었다. 그래서 또 믿었나 보다. 중독적인 헛걸음 들 사이의 간드러짐을 찾아 떠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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