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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영 Dec 06. 2024

9. 완벽한 타인

일상의 깊이

 만들어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가면을 쓰고 산다’ 고도하는데, 누구나 한 번쯤 거울 앞에 서서 가면을 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소한 미소일 수도 있고, 어딘가에 맞춰진 태도일 수도 있다. 이들 중에는 안타깝게도 그 만들어진 삶에 잡아먹힌 자들이 있다. 그것이 ‘나’인지 ‘꾸며진 나’인지 헷갈려하고, 가끔은 그 가짜 자아 때문에 본연의 나는 망가지고 사라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가면을 벗을 용기는 잃은 채, 가면과 자신의 얼굴이 하나가 되어버린 삶을 살아간다. 이 가면은 단순히 얼굴을 숨기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삼켜버린 허구의 껍질이다.


 만들어진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꿈을, 이상을, 바람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늘 타인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틀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인간 실격>에서 주인공 요조도 그러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타인의 시선에 매달려 연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기는 결국 그를 더 깊은 고독과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나도 요조와 비슷한 무대에 줄곧 서있었다. 진정한 자신을 감추고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진 무대를 걸었다. 내가 작품 속에 들어와 있다는 서늘함이 창문에 서리가 끼듯 자연스레 들어왔다. 열연을 펼치는 나와 다큐인지 드라마인지 알 수 없는 이 괴작을 시청하는 수많은 타인들. 때로는 나조차도 나를 무대 아래에서 관람했다. 제삼자로 바라보는 나의 연극은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인물의 감정이나 대사의 의도와 배경을 아는 것은 그만큼 작품을 즐길 요소가 많다는 의미. 그래서 나를 바라보는 나는 때로에서 곧 주로로, 이내 항상으로 바뀌었다.


 언제나 한 발짝 떨어진 상태에서 나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비평했다. 시작은 일기에서부터였다. 기억을 뛰어넘는 기록의 능력은 참 매력적이었다. 기록은 죽은 기억을 부활시킨다. 아름답고 아련하고 찬란하게 되살린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의 흉터마저 예쁜 타투로 덮어주는 시술은 중독적이었다. 일기장은 나의 수술 일지였다. 집착은, 끝이 없고 매번 더 큰 것을 요구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다. 유려한 곡선의 문신에 색을 입히고 싶었다. 그것이 글이었다. 일기를 글과 같이 쓰는 것. 비유와 이야기로 나의 기억을 기념하는 것. 다음은 내가 썼던 일기 중 하나이다.


 개구리는 느려지는 자연의 속도에서 계절이 바뀜을 직감한다. 위에는 항상 둥근 하늘의 모습만이 보이지만 그 속에서의 삶은 만족스럽다. 주섬주섬 겨울나기를 준비하며 또다시 어깨가 하늘까지 치솟아 있는 개구리이다. 사실 개구리도 본인이 바로 그 개구리임을 알지만, 또 그 밖의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현재 공들여 갖춘 삶의 태엽에 새로운 무언가를 추가하기에는 귀찮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 태엽은 녹슬게 되고 새로운 태엽을 추가하기에는 이미 늦어질 수도 있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는 그 말처럼 시야가 현재로 국한되어 있는 듯하다.


 믿기 힘들겠지만 일기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하던 때에 쓴 일기이다.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앳된 우화와 같은 이야기로 일기를 썼다. 이렇게 기억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을 때, 문제가 생겼다. 나의 기억들에 내가 실종됨을 발견한 것이다. 문신으로 가득한 나의 몸은 더 이상 내 몸이 아니었다. 그 비평에는 무대 위의 나만이 있을 뿐, ‘나’는 사라지고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그럴싸한 글로 옮겨놓은 글들 뿐이었다. 문장은 있지만 숨결은 멈춰있고, 메시지는 있지만 삶은 사라져 있었다.


 만들어진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닌 것 같다. 앞선 괴리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내면과 외면의 차이를 줄이려고 애쓰는 나의 삶이 증거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 내면을 외면 쪽에 맞추는 것이라면 그것도 건강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나’를 살려야 한다. 가면을 벗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속의 나에게 숨구멍을 열어줘야 한다. 가면을 쓰더라도, 그 가면이 나의 심연에 영향을 주더라도, 그 ‘본연의 나’가 나의 주인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정의하는 내면 속에서 새로운 것들이 뿌리내리기를 바란다. 각자의 방법에 맞게, 건강한 내면의 생존과 변화를 위하여 무대에 서길 바란다. 물론 그 심연에 잠식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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