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깊이
10대는 부서지는 파도와 같은 거친 청량함을 가진 푸른 철썩임의 나이이다. 그들을 이루는 몸도, 그들의 발걸음을 자극하는 마음도 시시때때로 변화하며 자라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순수함도 함께 거칠게 드러난다. 밝게든 어둡게든 그 하얀 색채는 그림자를 질 뿐 지워지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 잔잔한 바다가 되어 그때를 회상해 보면 맑았던 눈동자와 타올랐던 정신의 기형적인 조화가 떠오를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수련회였다. 학창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을 고르라고 한다면, 추억에 잠긴 여행자들의 대부분은 수련회를 이야기할 것이다. 수련회는 짧은 꿈이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꿈의 잔상이 남아 하루 종일 마음을 간지럽히는 그런 꿈. 그 꿈을 함께 꾼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기억. 그 시절의 우리는 몰랐지만,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별자리를 함께 지나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20대에도 그 꿈의 현장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만 특권처럼 주어지는 교회 수련회가 그것이었다. 교회에서는 10대뿐만 아니라 청년일 때에도 수련회를 갔다. 이를 특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종교적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땅에 내려앉을 안착의 시기에 조금 더 방랑할 수 있는 찰나가 주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학교와는 다른 성격이긴 하지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터지는 것만큼은 비슷했다. 교회 수련회는 변화산의 체험과 같다. 낮에는 마음을 모아 터뜨리는 단체 활동을, 밤에는 마음을 내려놓아 흐르게 두는 집회의 시간을 가진다. 집회에서는 기도를 한다. 기도는 말하자면 바닷가 모래 위에 글씨를 쓰는 일이다. 조용히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무언가를 적는다. 처음엔 그 글씨가 분명하게 보이지만, 파도가 한 번 밀려오고 나면 모든 글씨가 지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글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파도는 그 흔적을 바다의 깊은 곳으로 가져가, 언젠가 다시 다른 모양으로 돌아올 것이다. 눈부신 변화의 순간은 짧지만, 그 빛의 여운은 오래도록 우리를 비춘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이불을 덮은 채 밤의 속삭임을 나눈다. 서로의 영혼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홀로 걷는 나그네가 아니다. 그 시절의 우리는 몰랐지만, 그 밤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기에 누군가는 다시 그 불을 살리기도 하고, 다시금 손을 모아 기도하기도 한다.
20대 중반의 나이로 교회 수련회를 간 적이 있었다. 여전히 끓는 물과 같은 열정으로 낮을 보냈고 대화의 밤은 길었다. 밤의 끝이 길어질수록 아침의 삭제는 뚜렷하게 확정되었다. 실컷 떠들고 다음날 늦은 아침 일어났을 때, 우리들 사이에는 미담 하나가 떠돌았다. 누군가가 모두가 잠든 사이 어질러져 있던 대강당 전체를 청소해 놨다는 소문이었다. 우렁각시 이야기와도 같은 이 미담은 한참을 여러 입에 오르내렸고, 실제 이야기였다는 것이 각시가 누구인지 밝혀지면서 증명되었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그는 자신이었다고 밝혔다. 이른 아침 그가 홀로 넓은 강당에서 빗자루를 쓸고 있는 모습을 본 증언으로 인해 그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실을 밝히며 자기는 원래 청소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다고, 혼자 자취할 때에도 자기는 버릇처럼 빗자루를 쓸었다고 하얀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믿음은 그 친구의 변명에서나 다른 증인의 증언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사람 자체가 그럴 사람이었다. 평소의 그의 말이나 행동거지가 가장 핵심적인 증거였다. 나중에 또 이 친구에 대해 자세히 다루겠지만, 주변사람들도 이 증거를 채택했는지 별말 없이 인정할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어쨌든, 그 친구의 숨은 선행은 해가 뜨듯 밝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친구의 멋쩍은 변명에도, 모두가 우렁각시의 ‘당연한’ 희생에 감탄과 경의를 표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거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우린 희생을 한다. 몸을 갈거나 정신적으로 버티며 그 목적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깎으며 내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희생이 아니라 투자라고 볼 수 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육체적, 정신적 투자. 나의 시간이나 돈, 에너지를 미래의 그 목적을 위해 쏟는 것이라면 이를 희생이라고 볼 수 있을까. 희생이란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희생은 믿음과 같은 결을 두고 있다. 내가 희생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희생이라 생각한다. 당연하게 그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갖는 것. 그것이 희생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정말로 내가 좋아서 무엇인가를 선물해 준다거나, 너무나 당연하게 가정에서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 그것이 희생인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이것을 희생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희생은 실패가 되고 어떠한 목적을 가진 투자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가 아닌 관계를 위한 선물이나, 아무도 하지 않아서 가정의 불화를 막기 위한 집안일은 희생이라는 합리화로 그 본질을 덮어놓아도,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느끼는 노동의 크기가 점점 커지게 되면, 희생의 이름으로 덮어두었던 표면에는 금이 가기 시작할 것이다.
희생은 사회적으로 바른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지식인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다. 다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투자이고 우리는 진정으로 희생해야 한다. 당연하게 몸이 나가고, 치밀한 계산 없이 마음이 앞서야 한다. 이것을 하는 이유는 없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희생을 꼭 해야 하냐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희생해야 한다’라는 문구 자체가 희생의 본질을 흐린다. 하지만 희생은 해야 한다. 왜? 도대체 왜, 희생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이 이 바보 같은 서두름을 가능케 할까. 희생의 답은 결국 사랑에 있다. 진정한 의미의 희생은 사랑으로 시작되어 사랑으로 끝난다. 사랑하면, 내 속에 희생이라는 낱말은 점점 옅어진다. 물론 그 사랑도 건강한 사랑, 온전한 사랑이어야겠지만 사랑은 희생의 존재 인식을 망각케 하고 나를 쏟게 한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은 필수적이다.
그 친구는 그때, 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교회의 청년들을 사랑해왔나 보다. 사랑의 표현은 무궁무진하게 다양하지만, 언제나 가장 강력한 것은 꾸준하지만 은밀했고, 고요하지만 묵직한, 모두가 자는 아침의 빗자루와 같은 것이 아닐까. 자신만 모르는 그 희생이 그날 우리 모두의 파도에 따뜻함이라는 기억을 심겨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고요한 바닷속에서도 그 따뜻함을 기억하며, 언젠가는 다른 모양으로 다른 해변에 그 사랑을 돌려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