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깊이
해가 땅속을 파고들어 자취를 감추면, 주인공을 해보지 못한 녀석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별들은 자갈들 사이의 금과 같이 빛나고, 도시의 불빛들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외침이라도 하는 듯 흑암을 도려낸다. 군데군데 깜빡이는 촌의 등불들도 죽어가는 반딧불이처럼 욕심을 내려놓고 수명을 유지한다. 밤의 주인공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달은 잔잔한 물결처럼 묵묵하다. 그렇게 밤이 드리웠다. 하늘이 알리는 종전과 충전의 시간. 오늘의 끝과 내일의 시작 사이 어딘가. 하늘은 검은 잉크를 풀어놓은 듯하고, 별들은 그 위에 흩뿌려진 은빛 잔해처럼 반짝인다. 낮 동안 떠돌던 빛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세상의 주인이 된다. 어둠은 마치 오래된 연인이 손을 내밀 듯, 조용히 우리를 감싼다.
밤의 어둠은 무언가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낸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나뭇잎의 떨림, 미세한 바람의 흐름, 그리고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사유의 그림자가 그 어둠 속에서 선명해진다. 어둠은 눈을 감게 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눈을 뜨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심연을 밝힌다. 내재된 감정을 끌어올리거나, 보지 못하던 숨은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밤은 그렇기에 특별하다. 빛나기도 하면서도 어둡다. 고요하면서도 격정적이다. 어둠 속에서,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나’는 억압된 사회성의 틀을 벗어나 숨을 돌리려 한다. ‘나’도 밤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
밤을 밝혀주는 것은 어둠뿐만이 아니다. 침묵. 침묵은 ‘무’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존엄이며 없음들의 합창이자 모든 질문들의 문이다. 밤의 침묵은 귀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 기울이게 한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의 짖음, 나뭇가지 사이를 헤엄치는 바람, 그리고 나 자신이 잊고 있던 숨소리까지.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사라질 것들에 대한 잔인한 묵념이다. 밤은 고요 속에서 스스로를 키운다. 어둠은 낮 동안 쌓인 감정들을 어루만지고, 침묵은 마음속 헛된 소음을 하나씩 걷어낸다. 그렇게 깊어가는 밤은 우리를 스스로와 마주하게 하고,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
솔직함은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창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협력은 무엇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골칫거리겠지만 팀워크의 기틀은 하나됨, 마음을 모으는 목표와 과정의 합일일 것이다. 그 함께하려는 의지, 단합을 목적으로 우리 팀은 떠났다. 다행히도 부득이한 사정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 같이 떠났다. 청평의 한 리조트를 예약했다. 도착해 보니 우리의 소리만이 6층 높이의 건물을 가득 채웠다. 우리가 말을 멈추면, 곧바로 침묵이 공간을 덮쳤다. 그것이 두려워서였을까. 그것으로 인해 드러날 ‘나’가 두려워서였을까. 음악을 틀어놓았다.
단합 게임을 했다. 나름대로 활약을 하며 말도 쉬지 않는 산업 공장처럼 찍어냈다. 그것은 방 전체를 짓누를 어떠한 공기에 대한 도망이었다. 침묵을 왜 두려워할까. 나는 사실 침묵을 사랑한다. 침묵도 종류가 있었다. 혼자만이 갖는 초연한 고요와 여러 사람들 사이에 앉은 불편한 침묵은 당연히 다른 문제였다. 여럿이 함께하는 자리에서의 침묵은 산허리에 내려앉은 무거운 안개와 같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서로의 표정을 선명하게 읽을 수 없다. 말없이 흐르는 시간은 점점 더 짙어져, 이윽고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누군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만, 누구도 선뜻 안개의 장막을 헤치려 하지 않는다. 이 침묵은 오랜 동행이 아닌,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낯선 사이에서 싹트는 불편함이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더듬으며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찾는다.
반면, 혼자만의 침묵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와 같다. 물결은 고요히 잠들고, 그 위로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는다. 그 침묵 속에서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작은 소리들이 잔잔하게 울린다. 아무런 방해 없이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고독은 낯설지 않고 벗처럼 곁을 지킨다. 침묵은 무겁지 않다. 마치 눈부신 아침에 한 장의 책을 펼쳐 든 것처럼, 그 여백에서 삶의 의미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끝난 밤, 홀로 리조트 밖을 나왔다. 저녁 사이 눈이 내려, 내가 딛는 발걸음은 콰드득하며 두 침묵 사이의 경계를 깨뜨리는 듯했다.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불빛은 어둠이 가로막은 듯 가로등 주위에만 갇혀있었고 강의 물결도 죽어있었다. 멈춰버린 세계에서 나는 한참을 걷다 난간 앞에 걸음을 거두고 섰다. 나의 발소리까지 사라진 침묵의 절정의 순간, 나마저 그 흑암의 공기에 멈춰버린 순간, 그제야 나도 그 세계에 포함이 되었다. 장엄한 침묵 사이사이 숨겨져 있는 무언가가 멈춰버린 나에게 다가왔다. 살아있으며 격정적인 무언가가 고요 속에 드러났다. 그것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달은 구름 사이를 가르며 뜨고 있었고, 오리 한 마리가 어둠 속을 유영하며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그들의 벗끼리 조우하며 살포시 문안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가 있었다.
깊은 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고요함이 옷자락처럼 어깨를 감싸면 비로소 물에 비친 내 모습이 선명해졌다. 낮 동안 흩날리던 가면들은 조용히 벗겨지고, 오롯이 드러난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수면에 비친 달처럼 적막하고도 또렷했다. 그곳에서 나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잘 닦인 거울처럼 침묵은 본연의 나를 비춰냈지만, 그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감춰두었던 감정과 오래된 기억들이 물결처럼 퍼져 나갔고, 그 속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침묵은 그 목소리에 빛을 비춰주었고, 나를 이루는 결들이 하나하나 드러났다. 결국 침묵 속에서 나는 세상과 거리를 두지만, 그만큼 나 자신에게 가까워졌다. 마치 어둠이 깊어질수록 별빛이 더 밝게 빛나듯, 침묵 속에서 진짜 내가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