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깊이
하루는 길을 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무보다는 나뭇잎이 아닐까. 그것은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진 않았나 하는 자기 성찰이었다. 뿌리로부터, 가지로부터 오는 영양분은 무시하고 나의 떨어질 날만을 기다리며 공포에 떠는 나뭇잎. 감겨있는 눈을 뒤로하고 냄새를 따라 어머니가 차린 아침밥상을 맞이하는 일이나,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내리쬐는 햇빛 줄기가 호흡과 다를 바가 없어진 걸까 하는 두려움. 사소한 것을 특별하게 볼 줄 아는 것이 철학의 첫걸음이라는 소피 아버지의 말씀처럼, 내가 보는 것 너머의 무언가로의 전진을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돌이켜보면 삶은 받는 것의 연속이었다.
시선을 받는 것이 시작이었다. 시선은 태초의 빛과 같다. 처음 세상에 나를 데려온 것은 부모의 시선이었다. 그 시선은 마치 새벽의 햇살처럼, 아직 온전히 피어나지 않은 나를 어루만지며 존재를 알린다. 부모의 눈길은 무언의 언어로 “너는 소중하다”라고 말하고, 그 말은 내 안에서 첫 번째 숨처럼 고요히 퍼져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나의 받음의 시작은 분만실에서 마주한 그들의 시선이 아닌 내가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받았던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태어난 아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부모의 시선 안에서 온전히 보호받았다. 아이가 울면 부모는 바라보았고, 웃으면 함께 웃었다. 그 시선은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언어다. 마치 햇빛이 나무를 자라게 하듯, 부모의 시선은 아이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은 평생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난다. 햇빛 또한 마찬가지다. 창가를 넘어 들어와 내 이마를 간질였던 아침 햇살은 세상이 보내는 인사처럼 느껴진다. 나는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매일 그 따뜻한 빛을 받는다.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이 선물들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조용히 증명해 준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받는다. 사랑하는 이의 손길, 친구의 미소, 낯선 이의 친절, 그리고 말없이 전해지는 배려까지. 때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우리의 삶은 그러한 작은 선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흔히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받는 것 역시 사랑이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꽃이 스스로 피어나듯 보이지만, 실은 빛과 비를 받아 자라나듯이, 우리 역시 수많은 시선과 사랑을 받으며 존재한다.
이렇게 받는다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주는 이들의 관심과 노고가 함께 그 영역 안으로 초대된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떠난 어떤 목사님이 나에게 그러했다. 전역 이후 돌아온 교회 청년부에 계셨던 새로운 목사님이셨다. 그분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곰돌이 모양의 젤리를 주며 “시영아 안녕, 반가워.” 반갑게 인사하던 그 모습. 그러나 나는 마치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를 본 것처럼 어색해했고 실제로도 불편했다. 나를 잘 아는 지인들에게 나에 대해 익히 들어온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불균형을 없애는 것은 내려앉은 시소 끝에서 솟아오른 쪽 끝으로 넘어가는 일만큼 쉽지 않았고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갖기 위해, 가면 뒤의 나의 마음은 안갯속을 지나는 듯 급해지고 불안해졌다. 어색함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의 본성이 한 몫했다. 억지로라도 먼저 찾아가 말을 건다거나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들을 내던졌다. 마치 표적이 없는 궁사와 같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사님은 안개 아래의 호수와 같이 잔잔하면서도 고요했다. 때로는 유머스럽게 또 때로는 진지하게, 호수로 난사하는 돌덩이들을 품었다. 풍덩하고 생기는 파동들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듯, 터질 듯한 심장 박동과 침묵이 융화되며 시간은 두 사람을 맞닿게 하였다. 대화는 둘 모두에게 환영받았고 그때마다 우리 사이에는 곰돌이 젤리가 있었다. 받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 지금, 반갑게 인사하며 건네주었던 그 젤리가 지금 나의 여러 부분들 중 하나를 형성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가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수많은 받음들이 만든 지금의 나.
삶은 받는 것의 연속이다. 우리는 늘 타인의 시선 속에서 피어나고, 누군가의 손길 속에서 살아간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받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조용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시선과 손길을 전하는 원동력이 된다. 결국, 삶이란 서로 주고받는 시선의 흐름 속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다. 그리고 그 꽃은 우리가 받은 사랑과 온기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