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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낌없이 주는 나무 2

일상의 깊이

by 박시영

아낌없이 주는 나무. 소년이 노인이 되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준 나무의 이야기. 밑동만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던 나무. 그를 지칭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말이다. 목사는 늘 대중의 무대에 올라있다.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시간 속에서 하이에나들의 시선과 함께 그를 짓누른다. 어쩌면, 나무로 사는 것이 목사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목사라면 그래야 하니까.’ 한결같이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의 열매를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은 목사의 마땅한 도리니까. 그러나 단순히 따뜻한 말 한마디로 그치지 않는 그들의 사랑을 당연하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여러 목사를 만났다. 얼굴을 마주하기도 하고, 수많은 군중 속 한 사람으로서 만나기도 했다. 화면을 통해 보기도 하며 글을 통해서도 그들과 소통하곤 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듯, 다양한 목사가 존재했다.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목사의 덕목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도 뉴스와 신문 속에 여럿 있었다. ‘그럼 그렇지’라는 사람들의 말속에, 그들은 무엇이 그렇다는 건지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직업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사람들 중에는, 천직들이 숨어있었다. 목사의 덕목을 사람들 머릿속에 고정시킨, 또 목사의 선한 영향력을 여전히 믿게 하는 목사 천직들. 그중 하나가 그 목사님이었다. 그는 사랑과 열정의 결정이었다. 그것들의 한계는 나로서는 보이지 않았다. 끝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사랑과 열정이었다. 때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외로이 사랑하며, 우리를 위해 자신을 깎아내렸다.


하루는 그와 함께 동네 천을 걸었다. 원래라면 차를 타고 바로 교회로 향했겠지만 날이 좋아서였는지 그는 걷자고 했다. 나는 좋다고 했다. 시기상으로는 봄이었지만 열정이 불을 뿜듯 여름이 화끈하게 침범하고 있던 하루였다. 모두에게 공격을 감행한 여름이었지만 꽃들의 살랑임이나 우리의 대화는 건재했다. 오히려 나는 차가웠다. 목사님께서 자신이 곧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던 찰나였기 때문이다.


떠난다는 것은 아픈 축복과도 같다. 만남이 선물이라면, 이별은 선물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에게 많은 선물을 받았기에, 한겨울과 같은 이별 소식은 아팠다. 약 5년간의 동행의 마침표를 준비하는 그였다. 동고동락했던 긴 시간을 맺는 것은 오랜 가지를 치는 것처럼 마음이 쓰였다. 그는 사랑을 단순히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밑동만 남아 잘린 나무는 많은 곳에서 ‘사랑받음’을 선물했다. 그것은 땔감이 되어 본인을 태우며 사람들의 심장을 녹여주었다. 그것은 또 의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쉼을 누렸다. 그것은 또 종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또 다른 것이 되려고 한다.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겠지. 새로운 ‘줌’을 위해 떠나는 것이겠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묵묵하게 아낌없이 주고 또다시 주려고 다른 곳으로 떠나려 했다.


떠남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한 편의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 새로운 문장이 이어질 여백을 남기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새로운 만남으로서의 떠남을 응원할 수 있게 된다. 만남의 기억 속에서 숨을 쉬며 흔적을 남기는 떠남을 존재하게 한다.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받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주는 것의 기쁨에 닿게 된다. 받는 사랑이 마음을 채운다면, 주는 사랑은 마음을 확장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재를 통해 다음을 깨닫는 것. 완성된 지금으로부터 시작될 내일로 시선을 옮기는 것. 다가오는 여름을 보며, 봄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목사님은 그것을 알려주셨다. 사랑은 강물이 되어 넘칠 때 더 많은 곳을 적실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떠나지만 우리의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우리가 할 일은 그늘을 이어가는 것이다. 노인이 된 소년이 앉아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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