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마지막 이야기-쉼표
제법 쌀쌀해진 공기가 신선한 11월..
재희는 쇼핑몰 앞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며칠 겨울을 예고하던 차가운 날씨가 풀려 하늘은 가을같이 맑았고 바람은 제법 스산한 기를 품고 있었다.
맑게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다 갑자기 '피식!!!'웃음이 새어나와 자신도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랜 시간 일했던 학원 아르바이트도 카페 아르바이트로 수입은 줄었지만 재희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낯선 감정이 소중하게 생각되어 그리 억울하지가 않다.
그와 도란도란 얘기할 수는 없어도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고 가끔은 점심 후 후식으로 카페모카를 주문하러 올 때 짓는 그의 어색한 웃음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늘 생기 없고 끝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생활에 쉼표가 되어 준 진홍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지금의 공부도 좀 더 열심히 하고 싶어 졌고 하루빨리 누군가에게 자신에게도 직업이란 것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자신의 존재가 진홍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재희 자신에게 진홍이란 존재는 그런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12-1 버스에 오른 재희.
도서관으로 향하는 내내 파란 하늘을 감상한다.
그리고 진홍을 만났던 날부터 써 왔던 다이어리를 펼쳐 본다.
그와 처음 마주쳤던 서점에서 그에게 건네 받았던 반창고.
그리고 자몽에이드, 그녀의 다이어리, 그가 일하는 편의점 앞에서 찍은 사진.
참 달콤하기 짝이 없다.
다시 재희의 입매가 올라간다.
"재희야!!"
디스플레이 밑에서 일하고 있는 재희의 머리가 바삐 움직이는 걸 미소로 잠시 감상하던 진홍이 재희를 불렀다.
앉은 채로 진홍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만 들고 진홍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재희의 작은 눈망울이 사랑스럽다.
"어~!! 왜에?? 나.. 지금 바쁜데.."
바닥 청소를 하던 재희의 손에는 꽃 분홍색의 고무장갑이 끼워져 있다.
허리를 펴고 일어나며 재희가 대답했다.
진홍은 웃으면서 재희에게 말했다.
"어.. 그래.. 딴 게 아니고 내일모레 잠시 시간 되면 부천대에 같이 가자고.."
뜬금없는 진홍의 얘기에 재희는 당황스러웠지만 가고 싶었다.
"어?.. 아... 왜?.. 뭔데?"
진홍의 대답을 들으려는데 손님이 들어온다.
"어.. 일단 있다가 얘기하자. 나 간다. "
진홍은 뜬금없는 자신의 제안에 설명을 할 틈이 없어진 것 같아 다행이라 여기며 자신의 편의점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진홍은 며칠 전 버스 정류소에서 서 있는 재희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하늘을 쳐다보던 재희의 옆얼굴을 보다가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였던 것 같다.
서점에서 그가 실수로 다치게 했던 그녀.
확실한 답을 듣기 위해 진홍은 아직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친구, 대진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진 진홍은 톡을 보냈다.
그리고 2분도 안되어 대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진홍.. 웬일? 나 지금 잠시 화장실 왔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
"야.. 지난번 봄에 나 그만두기 몇 주전에 내가 사고 친 거 있었지? 왜 어떤 여자 다치게 했던 거."
"어.. 알...
아!!!!! 그래그래!!! 안 그래도 내가 너한테 말한다는 게...ㅎㅎㅎㅎ"
"뭐? 뭘 말해?"
"어.. 아니.. 너 그만두고 몇 주 뒤에 어떤 여자가 너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그때 그 여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긴 했는데.. 어쨌든.. 내가 좀 오버해서 너 연락처 알려 줬다.ㅎㅎㅎㅎㅎ 잘했지?ㅎㅎㅎㅎ"
뭐가 뭔지 머리가 뒤죽박죽 되어 진홍은 대진에게 말했다.
"어? 근데 왜 말 안 했어? 그게 언제 적 일인데? "
"어.. 말한다는 게 잊어버렸다..ㅎㅎㅎㅎ 뭐 연락 왔었냐?"
"아니... 그럼.. 너.. 이번 주 내 생일 때 잠시 좀 보자. 삼자대면. 나도 지금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애, 아무래도 그 여자였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아서..."
대진은 약속 장소로 나오기로 했고 진홍은 가슴이 뛰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게 자신에게 대면 대면하게 대하는 재희가 그때 그 달콤한 목소리의 그녀였다면?
재희는 왜 여기, 자신이 일하는 곳에 있는 걸까?
재희는 무슨 생각에서 이렇게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인가?
수많은 물음표들이 떠다녔고 진홍은 다음날 재희에게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는 진홍의 재안에 대한 확답을 받고 나서 더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저 즉석 떡볶이 맛집 탐방이라는 가벼운 약속이 구실이었지만 진홍은 단지 동갑친구로서의 가벼운 시작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진홍은 틈이 날 때마다 주변의 조용한 카페와 식당을 부지런히 검색했다.
그렇게 분주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진홍은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4시가 되어 나가는 것이다. 평소와는 분명 차이가 있는 차림으로...
불안해진 진홍은 괜히 심통도 나고 나중에는 미칠 지경이 되었다.
진홍은 갈피를 잡지 못 하고 머릿 속에서 소설을 서너 권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만큼 복잡한 심경이었으리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진홍은 버스 정류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앉았던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버스가 몇 번을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런데...
땅에 박힌 진홍의 시선에 여자의 신발이 그를 향해 서 있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재희다.
눈이 동그래진 진홍은 벌떡 일어나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 거리고 있다.
그런 진홍에게 자신을 기다렸다고 했다.
재희는 이제껏 진홍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밝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진홍아.. 역 앞에 카페 가서 잠깐 커피 한잔 할까?"
재희와 나란히 신호등을 건너 카페에 그녀를 마주 하고 앉은 진홍은 아직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재희가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재희는다소 차가운 바람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부탁했고 진홍은 기계적으로 일어나 주문을 하고 음료를 받아 왔다.
진홍은 아직도 얼얼한 기분으로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다가 탁자를 건드렸다.
그러자 재희가 대충 던져 놓았던 가방이 테이블의 반동에 의해 내용물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놀란 진홍은 뛰다시피 해 바닥에 흩어진 파우치와 이어폰 등을 얼른 주워 담다가 다이어리가 바닥에 펼쳐져 있다.
덮으려는 진홍의 눈에 두꺼운 메모지가 노트에 붙어 있는데 언뜻 번호가 낯이 익다.
진홍의 전화번호였다.
진홍은 놀라서 휘리릭 휘리릭 다이어리를 넘겨보았다.
작은 스냅사진들과 귀여운 글귀들이 가득하다. 사진 속에는 락카룸에 가지런히 놓여진 진홍의 운동화와 꼭 닮은 운동화 사진,쟈몽 주스 사진, 그리고 편의점에서 손님을 향해 서서 계산 중인 진홍의 옆모습의 사진 등등.......
진홍은 아득해진 눈으로 사진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얼른 재희의 가방 안에 다이어리를 뺀 모든 소지품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멍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고 재희는 잠시 후 손을 털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재희는 목이 말랐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진홍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본다.
재희는 진홍의 시선이 좀 불편했는지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렸다.
"많이 놀랬지?"
"어?.어... 나를 기다린 건 뭐고, 또 버스정류장에 있는 너는 또 뭐야? 두 시간 전에 너 퇴근했잖아?"
재희는 뭐라고 답을 할 수가 없어서 잠시 어색한 웃음을 바닥에 흘렸다가 눈을 들어 진홍을 바라봤다.
"진홍아..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리고 재희는 자신의 가방을 끌어당겨 안을 뒤적였다가 갑자기 당황한다. 몇 번을 뒤적거리다가 손이 빨라진다.
그러다 진홍을 한번 바라봤다가 다시 가방을 뒤진다.
진홍은 자신의 가방에서 금방 자신의 손으로 넣어두었던 그녀의 다이어리를 탁자에 꺼내서 내려놓았다.
재희는 놀라 진홍의 얼굴을 쳐다봤다.
"재희야! 이거 먼저 봐봐."
진홍은 재희에게 자신의 휴대폰의 화면을 켰고 재희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재희는 진홍의 휴대폰을 바라보다 진홍을 한참 바라보다 이내 눈물이 고였다.
"이게 뭐야?"
진홍은 재희의 떨리는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재희야.. 미안. 기분 나빴다면."
휴대폰 화면에는 진홍의 갤러리가 떠 있었고
그 속에는 창 너머로 몇 명의 인물들이 있는 사진 몇 장이 있었다.
진홍이 일하는 편의점 유리 밖의 풍경이었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몇 명 중 단발 파마머리의 재희의 옆모습과 뒷모습이 가득했다.
그리고 전철역의 광장 사진이었다.
넓은 광장에는 역시 재희의 뒷모습의 사진이 있었고 쇼핑몰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재희의 사진이었다.
"서점에서 내가 다치게 했던 사람 너 맞지?"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그랬어?"
"말하면? 나 진짜 이상한 여자 되지.. 어떻게 얘기해. "
그러면서 은근슬쩍 다이어리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진홍의 거친 손이 다가와 재희 손을 눌렀다.
재희는 놀라 진홍을 쳐다보았다.
"왜? 이거 내 거야. "
재희는 진홍의 손을 빼내려 했지만 진홍은 재빨리 다이어리를 재희의 손바닥에서 빼앗았고 재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여기에 왜 내 전화번호가 있고, 내 사진이 있는지 너도 설명을 해 줘야지. 그리고 이거.. 이제 네 거 안 될 것 같은데? "
"미안해. 그냥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냥 네가 멀어지지가 않았어.
그리고 우연히 너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마음이 갑자기 너무 커져 버렸어.
나도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 너를 써 내려가면서 그냥 행복했어. 그러다가... 갑자기 내 마음이 두려워졌고 너한테도 미안했어. 그래서 사실 오늘 너한테 미리 생일 선물 전해 주고 정리하려고 했어."
잠시 어색한 침묵을 깨며 해명하듯 재희가 입을 열었다.
"아.. 어.. 지난번 사장님이 우리 같은 나이라고 하시면서 네 이력서도 꺼내 보시다가 생일이 나랑 며칠 차이 안 난다면서 신기하다고 하셔서 알게 됐어. 네 생일."
성급히 말을 마치고 재희는 슬며시 진홍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진홍은 다이어리를 펼쳐 보았다.
진홍을 향한 소소한 편지 형식의 글들이 가득했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다 진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네? 이렇게 오래 기다릴만큼 나 멋진 남자도 아닌데..갑자기 나..미안해지네?ㅎㅎㅎ괜찮겠어? "
"그냥 열심히 살고 있는 너..좋아. 내 손 잡아준 것도 고맙고..그냥 사과하고 맘 정리하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된 거지? ㅎㅎㅎ"
둘은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