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표
두번째 이야기-느낌표
그렇게 쓸쓸하고 아릿한 가을을 맞이하게 했던 그가 그 곳에 있었다.
다행히 그는 놀라 멈춰 서 있던 그녀를 보지 못 한 것 같았다.
그녀는 걸어 나온 음료수 코너로 다시 등을 돌려 빠르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몇 번의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향한 자신의 이런 격한 감정에 대해 어의가 없었다.
'이름 세 글자 말고 네가 아는 게 뭔데 이렇게 저 남자를 반가워 하는 거니? ..저 남자는 너를 한 번 봤지만 너를 기억도 못해. 이러지 말자..이건 아니야.'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생각으로 복잡해진 마음을 얼른 덮어버리고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계산대를 향해 걸었다.
"1800원입니다."
계산을 하고 그의 인사를 뒤로 하고 나온 그녀는 자신의 이런 반응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가볍게라도 아는 척 하지 못하고 나온 것에 대해 후회가 되었다.
'그가 기억 못해도 그저 아는 척이라도 할 걸...그랬으면 더 좋았을 걸...내가 너무 생각을 못 했네...그랬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생각난 그 사람한테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텐데..바보...
기회도 못 잡고...'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약속 장소인 역사 안으로 들어 온 그녀는 몇 분 전에 들었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었다.
아직 남아 있는 그의 몇 마디의 말이 그녀의 귀에 맴돌았고 버스 승강장으로 쏟아지는 강렬하고 뜨거운 가을 볕처럼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가슴을 따끔거리게 하였다.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그녀는 놀라 얼른 손 끝으로 눈물을 털어 버렸다.
친구를 어떻게 만나고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생각했다.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그를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고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의 동요가 과연 무엇인지...
그의 어디가 이토록 그녀를 가슴 뛰게 하고 반갑게 하는지 도무지 그녀는 명확한 답을 스스로에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원한 사랑, 운명같은 사랑을 믿거나 바래 본 적 없는 그녀였지만 그냥 그녀는 어차피 혼자 시작된 감정인 만큼 그의 마음이 다가와 주길 바라는 욕심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지금의 자신의 감정이 자기 최면이 되었든, 혼자만의 사랑이 되었든 그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저 그를 향기 가득 자신의 가슴가득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는 없었기에
그저 투명한 유리를 통해 버스를 기다리는 척하며 그를 10여 분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의 흔적을 찾을 길 없었던 세 달여의 시간에 비하면 지금의 소박한 십 여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2년 전부터 해 왔던 개인 학원에서의 강사 아르바이트는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1년전부터 준비하고 있는 공무원 시험과 병행하고 있는 지금의 일이 그녀에게는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길이라 여기며 묵묵히 2년여의 시간을 지내오고 있었다.
무척이나 단조로운 그녀의 하루 시간이 2년여 지나면서 그녀는 무척이나 불안하고 두렵기도 했으며 외롭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마음만으로도 품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적어도 사막의 모래 바람 같은 그녀의 마음에 촉촉하고 시원한 단비 같은 그의 모습과 목소리만으로도 그녀는 되었다.
계산대로 오다가 등 돌린 채 서 있는 그녀.
뭐라고 중얼거리며 서 있다.
왜 그럴까 궁금했지만 마감을 해야했기에 그는 모른 척 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쟈몽 에이드를 건네는 그녀.
계산을 마치고 그의 인사에 대답도 없이 그저 총총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며칠 뒤.
매장 안의 탁자를 정리하던 그가 아까부터 매장 안을 들여다보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다.
그녀는 다른 곳을 응시하는 듯도 하고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역시..얼굴이 낯이 익다. 하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창 밖의 버스 정류소에 자주 출몰하였다.
하지만 결코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항상 십 여분의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고 그런 시간이 지나고 점차 그녀가 오는 날이 화요일과 금요일임을 알아 차렸다.
자연스러운 단발 파마 머리를 하고 늘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그녀.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지만 왠지 낯이 익은 그녀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두 달여가 지났고 옆 매장에 아르바이트 공고가 났다.
그는 출근하다가 커피 매장 안의 풍경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였다.
그녀가 청소기로 매장 안을 청소 하고 있다.
청소기 소음 때문인지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 꽂고 있는 그를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낯 익은 그녀가 이 곳에 있다.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으나 그의 존재를 알리 없는 그녀에게 그의 반색은 그녀를 당황스럽게 할 것 같아 얼른 준비실로 들어갔다.
옆의 캐비넷에 연 노랑의 난방이 살짝 문에 끼어 있다.
그래선 안 되는 걸 알지만 왠지 그는 그 캐비넷을 열어 보고픈 강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그녀의 아담한 체구만큼이나 작고 검은 백팩이 걸려 있고 연노랑의 외투 느낌이 나는 남방이 걸려 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는 왠지 불안해져서 캐비넷 문을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닫았다.
두 달 여를 지켜보아 왔던 그녀가 그와 함께
한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는 믿기지 않았다.
유니폼 차림으로 매장을 나오니 그녀는 청소를 끝냈는지 옆 매장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그리고 10시 쯤 되어 사장님이 나오셨고
한 시간 여를 커피 매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뒤 사장님이 그녀와 함께 그가 있는 계산대로 걸어왔다.
"이 쪽은 편의점 알바생, 진홍이. 권진홍이고..이 쪽은 이 재희씨. 인사하고..아..진홍이가 몇 살이지?"
"23살요."
"아..그래...재희씨도 23살이랬지?"
"네."
"둘이 동갑이네?ㅎㅎㅎ그래..어차피 오전 아르바이트는 둘 밖에 없으니까 잠시 자리 비우고 할 때는 서로 잠깐씩 봐주고 그럼 돼.
물어볼 거 있으면 진홍이가 그래도 여기 좀 됐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몇 일은 내가 같이 있을테니까 재희씨는 걱정말고..."
서로 인사를 마치고 사장님과 커피 매장으로 돌아간 그녀.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잠시나마 봤다.
늘 창문 너머 먼 발치에서 그녀의 모습을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생기가 있어 보였고 얼굴이 발그스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예쁜 얼굴은 아니어도 그의 마음에는 충분히 차오르는 모습의 그녀였다.
하루종일 옆 매장의 그녀가 궁금해서 계산대에 붙어 있지도 못하고 괜히 외부 창의 테이블을 왔다갔다 한다.
그리고 점심 때 즈음 되어 그는 사장님과 교대해서 점심을 먹었고 그녀가 있는 커피 매장으로 갔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조금이나마 입맛에 맞는 것으로 고르느라 한참을 매뉴가 있는 보드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계산대를 보았다가 계산대에 손을 얹었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아...저 커피 말고 뭐가 맛있나요? 제가 쓴 거는 잘 못 먹어서..ㅎㅎㅎㅎ"
"카페 모카 어때요?"
"네..그거 주세요..그럼..ㅎㅎ"
일한지 몇 일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제법 익숙한 솜씨로 빠르게 음료를 준비 해 주었다.
계산을 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그는 생각한다.
왠지 나도, 그녀도 서로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도무지 익숙한 저 얼굴을..저 목소리를 어딘가에서 들었는지가 너무도 궁금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군대를 제대하고 다니던 대학도 별로 신통치 않아 무얼할까 고민하면서 시작한 두 번째 아르바이트.
불안한 마음에 저녁에는 집으로 가기 전 마을 작은 도서관에 들러 토익을 공부하고 있다.
무엇에도 아직은 연결고리를 찾지는 못 했으나 그는 여러 자격증에 대해서도 틈틈히 알아보고 있다.
아직은 무언가 정해져 있는 것은 없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이 아니면 충분히 고민하고 깊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이 앞으로도 많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그였기에 그는 다양한 활동들을 해 보려 마음이 늘 분주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옷을 갈아 입은 뒤 마을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분수대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다
수 많은 사람들 속에 낯익은 그녀의 뒷 모습이 보였다.
쇼핑몰 쪽으로 가려는지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다.
그도 그녀와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을 때 신호가 바뀌고 그녀가 길을 건넌다.
쇼핑몰 바로 앞의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선 그녀는 간이 의자 앉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그럼..그녀가 두 달여를 편의점 앞의 버스 정류소에 서 있었던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