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삐뚤어질 테다.

꿈이었으면 싶다. 깨고 나면 기억도 나지 않는.

by 바다에 지는 별

"어? 희수야!! 혜진이는? "


진환은 퇴근하고 삼총사와의 술자리를 기대하고 왔으나 희수만 앉아 있어 물어본다.


"아... 오늘은 혜진이 안 불렀어. 너랑 할 말이 있어서. 한 잔 받아. "


"어? 아.. 그래. "

맑은 소주가 한 가득 작은 기포를 일으키며 잔으로 쏟아지는 걸 진환은 어색해 바라보았다.


둘은 잔을 부딪히고 한 잔씩 깨끗이 비웠고 진환은 괜히 둘만의 자리가 어색하고 희수의 말이 궁금해 채근하듯 희수를 쳐다보았다.


"ㅎㅎㅎ별 얘긴 아니야.."

"얘기해 봐. "

"응.. 너도 알고 있겠지만.. 진환아.. 음.. 내가 너 좋아한다고..ㅎㅎ"


진환은 뜬금없는 희수의 고백이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이미 혜진이의 마음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던 터였지만 진환은 셋의 우정을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응.. 알긴 하지. ㅎㅎㅎ 그런데.. 희수야. 나는 우리 셋이서 그냥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너랑 혜진이도 오랜 절친인데 좀 애매하잖아. "


"여기서 혜진이 얘기는 왜 해? 내가 너 좋다고 하는 상황에. 좋아하는 거 순서 있는 것도 아니고 네 맘만 얘기하면 돼. "


"아니. 나는 희수 너 좋은 친구라 생각해. "


진환은 평소의 그답게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답을 했고 희수는 그런 진환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반응을 예상했었다.

스스로 잔을 채우고 진환의 잔도 채워주며 희수는 먼저 진환의 잔을 부딪혔다.


진환도 잔을 비우고 음식을 말없이 먹었다.

희수는 말없이 또 자신의 잔을 비웠다.

진환은 그저 무심히 희수를 바라보았고 희수는 잔을 얼른 비우고 진환에게 입을 열었다.


"왜? 혜진이가 맘에 걸려서? "

"그런 것도 있지. "

"나도 혜진이 너 좋아하는 거 알아. 하지만 뭐? 내가 너 양보하란 법도 없잖아? 너도 나 싫지 않잖아? "

"그렇긴 해도 딱 너였으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


희수는 얼굴이 굳어져서 빈 속에 술을 급히 먹고 있었다.

진환은 희수에게 안주도 먹으라고 챙겨 주었지만 희수는 막무가내였고 급기야 한 시간도 안되어 한 병 반을 비워내고 있었고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진환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집에 가자며 그녀를 부축했다.


희수는 진환의 부축을 받으며 그녀의 집으로 향했고 얼마 되지 않아 희수 원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희수를 안으로 들인 뒤 진환은 희수의 샌들 연결고리를 풀어 주려 무릎을 구부렸다.


그런 진환의 넓은 등 위로 희수는 쓰러져 버렸다.

진환은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으나 금세 중심을 잡고 얼른 희수를 업고 자신도 신발을 벗고 희수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희수가 급작스럽게 진환의 등을 안아버렸다.


"희수야... 너 술 많이 됐어. 이러.."

희수는 진환의 입술을 막아 버렸고 갑작스러운 희수의 키스에 진환은 중심을 잃고 침대로 쓰러졌다.


희수는 진환의 위로 올라가 입술을 포갠 채로 진환의 옷 속으로 진환의 맨 살을 만졌다.

진환은 희수의 향기가 좋았고 희수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다.


희수의 고백을 거절하긴 하였으나 희수의 이런 갑작스러운 스킨십은 처음이 아니었던 진환이었고 진환은 희수의 등을 안았다.


희수는 입술을 떼고 진환을 바라보며 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 지금부터는 혜진이 생각하지 마. 나는 먼저 너한테 손 내밀었을 뿐이야. 너도 손 잡은 거고. "


진환은 팔베개를 하고 희수를 그의 곁으로 끌어당겨 부드럽게 키스했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혜진은 여느 때처럼 퇴근하고 엄마가 부탁한 삼겹살을 들고 삼총사의 아지트를 지나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던 혜진은 비틀거리는 희수를 진환이 부축하는 모습을 봤다.


혜진은 그곳으로 향하려다 걸음을 멈췄다.

반쯤 감은 눈으로 진환의 부축을 받던 희수가 진환이 계산하는 동안 기댄 채 혜진 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희수는 진환의 부축을 다시 받고 술 집을 나섰다.


잠시나마 마주친 희수의 눈 빛에선 분명 경계의 의미가 강렬하게 풍겨져 나왔던 걸 느꼈던 혜진은 급히 가게 안으로 몸을 숨겼고 그들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한 참 뒤 혜진은 희수의 원 룸의 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켜진 거실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반쯤 넋이 나가 눈에 초점이 없이 터덜터덜 걸어서 아까 희수와 진환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았다.

분명 둘이 들어갔는데 진환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혜진은 벌써 그녀의 치사량인 두 병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 시간 이후로 모든 사고가 멈춰버렸다.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번진 마스카라 따위, 흐르는 눈물 따위를 닦을 여력이 없었다.


시끄러운 모든 소음에서, 세상을 스스로 격리시켜 버린 혜진은 그저 먹은 술을 눈으로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현수는 동창들의 시끌벅적한 자리가 갑갑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다 창가에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여인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귀여운 판다와는 거리가 먼 얼룩진 얼굴이 너무 기괴하다는 생각을 하다 담뱃불을 끄고 다시 술집으로 들어왔다.

왠지 그녀의 자리를 거슬러 가고 싶어 진 현수.


그녀의 테이블에 걸음을 멈추고 혜진에게 잠시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현수를 흘끔 올려다 보고는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현수는 애매한 손 짓에 그냥 혜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권현수입니다. 나쁜 사람 아니고요..ㅎ 그냥 혼자 앉아 계시길래 앉았습니다. 싫으심 얘기하셔도..."


쾅!!!!!!!


여자의 머리가 닫힌 불판 스테인리스 뚜껑에 부딪히며 굉음을 냈고 현수는 얼른 여자의 옆자리로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들어 벽 쪽으로 기대게 했다.


"괜찮아요? 여보세요? 눈 좀 떠보세요."


반쯤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서는 무슨 말인지 계속 혀가 움직이고 있었다.

현수는 귀를 가까이 댔다.


"아리아... 아리라고.. 아리야.. 아리야.."

혜진은 익숙한 향수 냄새에 갑자기 눈을 번쩍 떴고 자신의 얼굴 앞에 와 있던 귀를 냅다 물어 버렸다.


"앜!!!!!!!!!"

"아!!! 아!!!!! 아!!!!! 저기요.. 아!!!!!!"


순간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현수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당겼고 그대로 둘은 식당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놀란 종업원이 달려왔고 현수의 친구들도 달려왔지만 짐승의 소리를 내며 현수의 귀를 물고 있는 여자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아아!!!!!!!!!!"

현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팔을 꺾었고 여자도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그의 귀를 놓아주었다.


"나픈 씨끼야아아!!!!!!!!!!!!야!!!!!!!! 야!!!!!!!"


몸을 일으켜 세우긴 했으나 팔과 발을 마구 휘저으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를 현수는 의자에 다시 앉혔다.


"놔!!! 놔!!!! 이씨!!!! 아픈 쓰기야아!!!!"

소리를 지르다가 창문 옆으로 정신을 잃고 스르륵 스러져 버리는 여자.


현수는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며 손사래를 쳤고 종업원들에게도 자리를 비켜 달라고 했다.


둘만 남았고 현수는 상체와 전혀 각도가 맞지 않은 다리를 몸과 나란히 되도록 올려 주었다.

정신을 잃었지만 다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움직인다.


"아리아.. 아리야.. 아이라고...."


현수는 그녀의 번진 얼굴을 물티슈로 닦아내고 아까 넘어져 까인 손 등도 닦아 주었다.

여자가 아픈 건지, 귀찮은 건지 손을 뿌리치며

소리친다.


"햐아..햐아..야아!!!!!이씨!!!!"


다시 잠잠해진 여자.

현수는 여자가 베고 있는 비닐봉지를 뺐다.

그 속에는 삼겹살과 여자의 휴대폰이 있다.

그 흔한 비밀번호 하나 없이 화면이 켜졌다.

연락처를 누르니 처음 1번인 박 여사가 눈에 띈다.

현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아까의 몸싸움으로 취기가 다 사라진 현수는

수컷의 음흉한 마음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그 육탄전과 단어 몇 마디로도 대충 이 여자가 왜 이러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1번 박 여사를 길게 누르자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연결이 되더니 현수가 말도 꺼내기 전에 박여사라는 분의 고함소리가 시작되었다.


"야 이년아!!!!!! 너!!! 어디야? 늦으면 늦는다고 해야지. 돼지농장 가서 고기 끊어오냐? 어? 이게 그냥!!! 12시가 다 됐구먼 어디냐고!"


"아.. 어머니... 저.."


"어? 누.. 누구세요? 우리 혜진이는요? "


"아.. 혜진 씨가 지금 술이 좀 돼서 연락드렸습니다. 잠이 들어서..ㅎㅎ여기 정육 식당이거든요. "


"예에?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금방 갈게요.. 잠시만 좀 기다려 주세요,. 아이고.. 아이고.."


현수는 혜진이라는 이 여자의 박 여사가 최대한 충격을 덜 받게 하고 싶어 산발된 이 여자의 머리를 만져주고 아까 지우다가 남은 마스카라 자국도 말끔히 지웠다.


집이 가까운지 10분도 안 되어 여자의 박 여사가 나타났고 길고 예쁘게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현수의 얼굴을 반쯤 입이 벌어진 채 쳐다본다.


"ㅎㅎㅎ아.. 저는 권현수라고 합니다. 이 분하고는 전혀 모르는데.. 오늘 좀 과음하셔서 일이 좀 생겨버렸네요..ㅎㅎㅎ 혼자 오셨으면 가까우신 것 같은데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


"예? 아.. 아이고.. 그럼.. 미안하지만 좀 부탁드릴게요.."


현수는 여자를 반쯤 세운 뒤 여자를 업었다.

그러자 축 쳐진 팔 두 개와 머리카락이 현수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여자는 의외로 얌전하다.


박여사라는 분은 종종걸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길안내를 했고 빌라 현관문을 열고 그녀의 방으로 안내했다.


침대에 내려놓자 박여사라는 여인은 여자의 허벅지를 때리며 소리친다.


"야!!!! 이게 진짜!!!!!"


여자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아.. 뭐... 뭐.. 고기 사 왔잖아.. 씨..."

"고기가 문제야? 이년아!!!!"


찰싹!!!!!


"아~~!!!! 아~~!!!! 자꾸 때린다.. 아.. 씨.. 아픈데..."

침대에 반쯤 몸을 걸치고 ㄱ자로 꺾인 팔과 다리를 따로 움직이며 여자가 발버둥 친다.


민망해진 박여사라는 여자는 여자의 다리를 올려놓고 방을 나온다.


"아유...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어떡해요...ㅎㅎㅎ헉!!!"


현수의 머리를 갑자기 돌려 본다.

그제야 현수는 통증이 밀려왔지만 박 여사에게 말했다.


"아.. 이거 아까 넘어지면서 좀 다쳤는데 괜찮습니다.ㅎㅎㅎ"


"아니.. 그게 아니.. 아이고.. 쟤가 물었어요? "

"ㅎㅎㅎ아.. 아니.. 괜찮습니다."

"내.. 이.. 저 년을!!!!!"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서 문을 닫고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소리.


"아~~~~아~~~아프다고오~~~그만 때려어~~~~~!!!이씨이..힝~~히잉~~~"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조신히 문을 닫고 나오는 박 여사의 손에는 구급상자가 들려 있다.


https://youtu.be/mGyLGMrzW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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