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면 채워진다.
"엄마아아....으...으..어어엄마아...."
머리속을 누가 휘젓는 고통에 눈조차 뜰 수 없었던 혜진은 소리도 지르지 못 하고 낮게 신음했다.
식은 땀이 나고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 헷갈렸고 머리를 일으키려 하자 온 세상이 뒤집혔다.
쿠웅!!!!!!!!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박여사가 소리쳤다.
"으이구!!!!!! 아주 가관이다...못살아 못살아!!!!"
혜진을 바로 앉혀주며 혀를 차는 박여사.
"쯧쯧쯧!!!! 너 왜 마시지도 못 하는 술을 먹고..안 하던 짓을 해? 응?"
"그냥..기분이 좀 그랬어..아..엄마..나 죽을 것 같아. 욱!!!!"
헛구역질을 하는 혜진의 등을 쓸어주고 다시 침대에 조심히 눕혀 주고는 황급히 나갔던 박여사는 시원한 꿀물을 가져와 혜진에게 내밀었다.
"속 안 좋으니까 조금만 먹고 그냥 좀 누워 있어. 회사에는 전화해 놨어. 엄마도 일하러 가야 하고..콩나물국 좀 있다 먹어봐. 밥은 못 먹겠다..너..엄마 갔다 올께..전화할께."
"응..엄마..미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들이마셨던 숨과 함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흡,.!!!!흐흡!!!!!"
혜진의 컨디션은 일주일이 넘어서도 제자리로 돌아올 줄 몰랐다.
자꾸만 소화가 되지 않고 몸살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늘 기분 나쁘게 주변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모든 것이 뒤엉켜 버린 느낌이었다.
그리 깊이 사랑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짝사랑을 좀 길게 했던 것 뿐이지만 자신의 절친인 희수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서도 진환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늘 상처는 낯선 사람에게서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법.
가깝기에 그 상처는 더 치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퇴근길에 포장마차에서 흘러 들어온 매콤한 어묵 냄새에 갑자기 잃었던 식욕이 확 오르는 느낌이 들어 어묵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흐음~~♡♡♡"
매콤하고 자극적인 어묵의 맛이 갑자기 입 안 가득 침을 만들어 냈다.
정신없이 어묵 국물과 함께 세 개를 해치우고 훌쩍거렸던 코를 팽!!!! 풀었다.
계산하고 밖으로 나와 들이마신 밤 공기는 너무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흐어!!!!!시원해~!!!'
혜진은 갑자기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내 것도 아니었던 사랑인데..뭐 이렇게 오래 뭉개? 잘 먹고 잘 살아. '
집으로 가는 길 발걸음이 마음만큼이나 가볍고 여유가 있어 혜진은 달달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혜진은 다음날 주말을 끼어 5일의 휴가를 냈고 제주도 배낭 여행을 떠났다.
제주 공항의 파란 하늘은 너무 아름답다.
갑자기 혜진은 파란 가을 하늘과 상쾌한 바람을 맞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느꼈다.
혼자만의 여행이 처음이지만 혜진은 그게 더 좋았다.
아무에게도 표정관리 할 필요없고, 말하기 싫은데 이것저것 주절대지 않아도 좋고, 마음껏 심각해도 설명할 필요없는 혼자가 좋았다.
쨍한 날씨가 혜진의 말끔해진 마음과 어울려 혜진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먼저 자전거를 빌리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공항에서 천천히 걸어 이동해 자전거 대여소에서 간단한 수칙 안내를 받고 바로 해변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내리쬐는 가을볕이 등을 따끔거리게 했지만 더할 나위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자전거 하이킹 코스.
그러나 왠걸 평지에서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오르막길이 자주 나타나서 다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혜진은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 하우스에 미리 가서 좀 쉬기로 마음먹고 네비게이션을 따라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주인은 없었고 안내 팻말에는 오후 3시에 입실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하는 수 없이 혜진은 마을 주변을 어슬렁 거렸다.
소박한 제주집의 모습과 주인 없는 집을 지키는 개들과 교감을 즐기며 마을을 구경했다.
그리고 가게에 들어가서 커피하나를 사서 홀짝거리며 마을을 천천히 걸어다녔다.
이윽고 입실 10분전.
혜진은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고 다행히 주인이 있었고 혜진은 숙박할 수 있었다.
깔끔하고 쾌적한 4인실.
혜진은 별다른 계획을 잡지 않았기에 책을 읽다가 밤이 올때까지 편하게 낮잠도 한 숨 자보기로 했다.
그리고 혜진은 잠이 들었고 물을 마시기 위해 공동거실로 나왔더니 주인이 바베큐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고 얘기한다.
혜진은 딱히 할 일도 없고 출출하기도 해서 파티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워진 고기를 가져와 한 접시 먹고 두 접시를 먹다가 계속 혜진을 흘끔거리는 한 남자의 시선과 마주친다.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다.
혜진은 어의가 없어서 그의 눈길을 무시하고 먹는데 집중한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접시를 들고서 혜진의 테이블로 왔다
"혜진씨 맞죠?"
능글맞은 웃음으로 묻는 그를 향해 혜진은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 사래가 걸려 버렸다.
"컥컥컥!!!!!!!....켁켁!!!!....누...누구세요?"
"ㅎㅎㅎㅎㅎ괜찮으세요? 먼저 물 좀 드세요. ㅎㅎㅎ 아..저 모르실 거예요..혜진씨는...
저만 혜진씨를 알죠..ㅎㅎㅎㅎ"
혜진은 건네주는 물컵을 한 모금 들이킨 다음 무슨 외계인을 쳐다보듯 남자를 올려다 봤다.
"뭐요? 누구신데 저는 모르고 그 쪽은 저를 아는 거예요? 뭐세요?"
"ㅎㅎㅎㅎ그렇게 얘기하실 만도 하죠..저 먼저 앉아도 되죠? 저 권현수라고 합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구요..ㅎㅎㅎ 얼마 전에 안암동의 한 술집에서 혜진씨 처음 뵜어요. 그 때도 이렇게 허락없이 앉았는데..ㅎㅎㅎ"
"안암동 술집? 거기에 왜 그 쪽이 있었고 저는 왜 기억을 못하는 거죠?"
"ㅎㅎㅎ 그 때 혜진씨 까만 비닐봉지 하나랑 같이 술 드시다가 기절하셔서 제가 집에 데려다 드렸는데...어머님은 아실 겁니다. 혜진씨는 당연히 저를 모르시는 게 맞는 거구요..ㅎㅎㅎ"
혜진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현수를 한참을 쏘아보다가 엄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현수의 얼굴에서 거두지 않고 신호음을 듣고 있다.
"아!!! 엄마!!! 나 예전에 술 많이 먹은 날 누가 나 데려다 줬어?"
"이 년이...뭐 좋은 기억이라고 그 얘기는 또 하고 그래? 엄마 바뻐!!!"
"아니 아니..엄마!!!! 그때 남자가 나 집에 데려다 줬어? 권현수라는 사람 맞아? 맞아?"
"어? 어..그래..그랬어..왜?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진짜???? 허얼!!!!! 알았어..일단 끊어봐."
혜진은 의심의 눈빛을 거두고 현수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거봐요. 저 나쁜 사람 아니죠? ㅎㅎㅎㅎㅎ"
"아...네...그 땐 고마웠어요. 제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근데 저 그 때 한 번 보고 저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
"본지 얼마나 됐다고 기억 못해요? 그 때 이후로 어머님이 전화번호도 알려 주셨는데 많이 궁금하더라고요. 근데 혜진씨가 나를 모르니까 연락하기도 애매하고..ㅎㅎㅎㅎㅎ 지금은 괜찮아 보이시네요. "
"ㅎㅎㅎ네..지금은 뭐...괜찮아요. 뭐 그렇게 맘 고생, 몸 고생할만한 일도 아니었고...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집은 분명 서울분 이실텐데..."
"가을에 꼭 제주도에 한 번씩 와요. 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가곤 해요. 근데 어떻게 서울도 아니고 제주도에서 혜진씨를 다시 보게 되네요? ㅎㅎㅎ신기하다...그쵸?"
"그러네요. ㅎㅎㅎㅎ 맥주 한잔 하실래요?"
혜진은 현수에게 한 잔 가득 맥주를 따라준다.
자신의 잔에도 현수가 맥주를 건네받아 따라준다.
둘은 가벼운 눈 웃음과 함께 잔을 부딪히고 한 모금 마신다.
"혜진씨 제주도 처음 오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자전거 끌고 오는데 차림이나 짐이 그렇게 자주 자전거 하이킹하시는 분은 아니란 거 알았어요. ㅎㅎㅎ 보통은 자전거 여행하면서 그렇게 큰 배낭을 메고 오진 않거든요. ㅎㅎㅎㅎㅎ"
"ㅎㅎㅎㅎ아..그래요? 그러게요. 처음인데 그냥 뭐 여행한다는 느낌보다는 쉬러 온거라 별 생각없이 짐을 싸다보니...ㅎㅎㅎㅎㅎ"
"아...저도 그렇게 막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지는 않아서 그럼 내일 아침 드시고 점심 때 즈음에 버스 여행 같이 해 보실래요? 버스 타고 갔다가 그 주변에서 구경하고 다시 버스 타고 돌아오는 식으로 ...어때요? "
"와!!!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ㅎㅎㅎ 저는 그냥 책이나 보고 산책이나 하고 관광지 몇 군데 가보고 말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고마워요.. 그럼..내일 부탁 드려도 될까요? "
"ㅎㅎ 뭐 어렵나요? 그럼 내일 11시 쯤 출발하는 걸로 하면 될까요? "
"네.ㅎㅎㅎ고마워요. "
혜진은 숙소로 돌아와 양치를 하고 거의 스러져 가는 노을을 보기 위해 마을로 걸어 나왔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런 데서 나를 알지만 나는 모르는 남자도 만나고... 왠지 기분이 묘하네? ㅎㅎㅎ '
혜진은 자신이 어떤 추태를 현수에게 보여줬는지를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달콤한 그와의 인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 때 울리는 엄마의 전화.
"여보세요?"
"야!!너 근데 아까 그 현수얘기는 뭐야? "
"아...엄마..그 때 나 집에 데려다 준 사람이 여기 제주도에 있네? 나 묵는 숙소에서 나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해서 확인 전화 한거지. 내일 같이 버스 여행 가자네? ㅎㅎㅎ"
"야!!이 년이...니가 어떻게 했는데 그 남자랑 버스 여행을 가? 부끄럽지도 않냐? 하이고..이 년..진짜 엄마지만 너 낯짝이 있으면 그렇게 헤실거리고 좋아할 일이 아니야..이년아!!!!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나는 혜진.
"어? 엄마..왜? 내가 뭐 어떻게 했는데? 왜..왜?"
답을 듣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혜진의 휴대폰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사라졌다.
어느 새 현수가 혜진의 휴대폰을 들고 그녀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아!!어머니!!저 권현숩니다.ㅎㅎㅎ 잘 지내셨죠?ㅎㅎㅎ 아..그럼요..잘 지내죠..여기서 이렇게 혜진씨 보네요? ㅎㅎㅎ 아..걱정 마세요. 그리고 어머니!!!그 때 저랑 하신 약속 잊으신 거 아니시죠? ㅎㅎㅎㅎ 그럼 저 그렇게 알고 전화 끊습니다?ㅎㅎㅎ아..네...내일 잘 다녀오겠습니다..안녕히 계세요. "
현수는 능청스럽게 혜진의 휴대폰을 돌려 주며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