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직장맘이 예비 직장맘에게...
오늘은 목요 야간진료가 있는 날.
다른 선생님들은 다 퇴근하고 홀로 남아 세 시간 동안 혼자 민원을 봐야 한다.
가볍게 저녁을 먹고 낮동안 업무를 보는 중간에 할 수 없었던 청구 건들을 정신없이 입력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조용히 무거운 공기를 밀어내듯 조심스러운 문열림.
임산부 민원 한 분이 차분히 자리에 와서 앉는다.
업무를 미뤄두고 임산부 등록 절차를 진행한다.
제공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드렸더니 첫 임신인만큼 이것저것 질문이 많다.
차분히 물음에 답을 하는 내내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
화장이 여기저기 지워져 조금은 색깔이 차이가 나는 얼굴에 피곤한지 다크는 화장이 다 숨겨주지 못한다.
립스틱은 반쯤 지워져 빨강과 분홍의 중간 어디쯤의 색을 띠고 있다.
나의 눈을 그녀에게 고정시키고 나는 물음에 능숙하게 답을 하면서 책상 서랍 어딘가에 있을 그 무엇을
조용히 찾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임신 초기에 필요한 엽산제와 안내지 그리고 츄어블 비타민 두 알을 가위로 잘라서
그녀에게 조용히 건넸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엄마 닮아서 부지런하고 야무진 아기 태어날 것 같아요. "
나의 웃음과 그녀의 웃음소리는 같은 파장으로 진동한다.
야간진료는 직장을 다니는 임산부들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서비스이다.
요즘은 산모들도 웬만하여서는 초기에 퇴직하거나 휴직을 하는 일이 거의 없이 막달 즈음해서까지 일을 하는 추세인만큼 이용률이 그리 낮은 편은 아니다.
낮에 배우자들과 손을 잡고 달뜬 표정과 억양으로 '우리 지금 너무 행복하거든요.'라는 분위기를 마구마구 풍겨대는 여유로운 산모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그녀들의 모습.
야간진료를 이용하는 그녀들은 대부분 많이 지쳐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본인이 받을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해서 핵심을 찌르는 빠른 설명을 원한다.
본론만 듣고 싶은 것이다.
그녀들의 급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최대한 그녀들의 요구대로 받을 수 있는 물품과 검사를 빠르게 진행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이용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진행한다.
한치의 망설임이나 여운 없이 실을 나가는 그녀들의 뒷모습.
그들은 과연 직장맘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것일까?
직장생활에서의 치열함과는 또 다른 육아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그녀들은 과연 짐작이나 할까 하는 물음들....
같은 시간을 지나왔던 내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들의 모습은 참 대단하고 대견하다.
힘든 임신 초반에 직장생활을 하며 관공서의 무료 서비스까지 챙기는 야무진 모습만 봐도 출산 후 그녀들의 추이가 짐작이 된다.
지금의 야무진 모습이 직장인이자 아이들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삶을 살아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게 할 것이고, 그때그때의 어려움을 견디게 할 것이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게 할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 업무를 보는 게 힘들 때 의도적으로 웃을 때가 있다.
그 웃음의 주제는 다양하지만 결국은 육아나 엄마, 결혼생활에 대한 것들이기에 그들과 공감하기에 충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직장맘이예비직장맘에게
그런 종류의 웃음이나 뜬금없는 배려, 작은 선물들은 인간적으로 내가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들보다
내가 먼저 그 시간들을 지나왔던 사람으로 그들을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다 나 스스로에게 필요한 시간이다.
지루함을 극도로 견디기 어려워하는 내 성격 탓이다.
직장인으로서도 일을 잘 하기보다 최대한 영혼을 넣으면서 자신을 회사에만 저당잡히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을 지켜내면서 살고 싶은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부터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하기가 어려워 왕복 한 시간 정도의 출퇴근을 하고 있는 요즘.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부랴부랴 마무리를 하고 걸어서 퇴근한다.
시원한 가을밤 바람.
땀에 흠뻑 젖어 도착한 시장 어귀에서 시장을 보고 집에 도착.
딸 방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했는지 물었더니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아 늦은 시간까지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계란죽을 5분 만에 완성해서 상을 차려준다.
배가 많이 고팠다면서 계란죽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며 미안해진다.
놀고 온 것이 아님에도 괜히 운동한답시고 빨리 달려와서 밥을 차려주지 못한 미안함이라고 하면 너무 조선의 어머니인 것일까?ㅋㅋ
무튼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약을 챙겨 주고 자리에 가서 눕는 것을 등으로 느끼고 다시 시작된 집안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감으로 최소한의 집안일을 하는 내내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소리.
그 소리를 들은 딸은 제주도 해녀들이 깊은 잠수를 하고 수면 위로 떠오르며 내쉬는 휘파람 소리를 닮았단다.
몰아 쉬는 숨으로 치면 그녀들의 숨과 나의 숨은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직장인.
두 아이의 엄마.
아직은 괜찮은 몸매와 여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나라는 사람.
뜨거운 열정으로 즐겁게 인생을 즐기고 싶은 사차원의 나.
이렇게 다양한 욕구를 가진 나라는 사람은 늘 숨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들의 삶과 그리 다른 삶은 아니라고 믿는다.
나와 비슷하거나 좀 더 다양한 욕구들을 가지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결코 그 어떤 것도 놓을 수 없고, 놓지 않아야 각각의 모습의 자신끼리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에 욕심이라고 이름하지 말자.
일과 육아와 자신.
직딩과 엄마와, 나라는 이름 모두 중요하다.
예비 직장맘과 20년 가까운 중년 직장맘은 이렇게 지금의 장소에서 서로의 미래와 지나쳐 온 시간을 데자뷰하고 오버랩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얘기에도 함께 웃을 수 있고, 함께 옅은 진동 감으로 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