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심란한 꿈으로 자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 모르게 새벽이 왔다.
가슴도 답답하고, 화도 나고, 짜증도 난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런저런 문제들로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많이 다쳤다.
그런 것들을 나의 무의식은 다시 일깨워주기만 할 뿐 정리를 해 주지 않는다.
더 누워있기 싫어져서 머리를 질끈 묶고 모자를 쓰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살짝 차가운 아침 바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집 앞 골목을 벗어나 운동장으로 걸어가는데 어느 양옥집 담 너머 진한 자주색 작약이 고개를 내밀고 아침바람에 몸을 흔들며 웃음을 흘린다.
유년시절 우리 집 앞마당에 꼭같은 작약이 있었기에 그 몸짓은 내게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막내를 예뻐하던, 작약을 좋아하시던 아빠가 생각났다.
무거운 마음에서 한 발짝 떼고 걸음을 옮긴다.
바람이 여전히 기분을 좋게한다.
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예쁜 꽃들과 푸른 잎들이 바람에 상쾌하고, 경쾌하게 흔들린다.
예쁘구나...
조기축구하는 사람들..운동하는 사람들..사람들..사람들...
또다시 사람들 속에 있다.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나는 또 사람들 속에 있다.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리워하면서도, 그 속에서 주고받는 상처들에 지치고, 자괴감에 빠지고는 한다.
반복되는 실망과 좌절감, 그리고 자괴감이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길, 사람에 대해서 냉소적이게 되길 간절히 바래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더이상 다치지 않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두고 방어한다.
하지만 늘 제자리 걸음이다.
학교 앞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더 이상 서로에게 다치지 않기위해 멈춤 신호를 켜둔 내 마음처럼 말이다.
지금은 홀로다.
친구도, 사랑도, 지인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되도록 자신에게 침잠해 있다.
한없이 작아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자신을 몰아세운다.
그리고 이른 아침 여러 모습의 어르신들이 지나가고 내 눈 앞에 의자에 혼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빙긋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노인을 바라본다.
노인의 시간은, 노인의 하루는 어떨지 생각해 본다.
내가 만났던 노인들의 시간은 바쁘기도 하지만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의도적인 바쁨이 많았다.
지루하고, 외롭고, 그리운 시간들을 잊기 위해 어떤 사람은 여러가지 일들을 만들어서 그 홀로됨을 견디는 이도 있었고 그저 그 외로움과 그리움도 인생의 한 조각임을 인정하고 홀로됨을 받아들이며 사는 이도 있었다.
결국은 나이를 먹어도 사람을 그리워하고, 홀로됨을 힘들어하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뜻이리라.
노인이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었던 것은 무엇일까?
손자들의 귀여운 사진이었을까?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의 영상이었을까?
결국 어리든, 젊든, 나이가 들었든 모든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뜻이겠지.
요란스럽고 피곤한 인간관계에서 지쳐 더이상 상처를 주고받지 않기 위해 철저히 방어하고 경계하며 홀로된 삶을 사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 아침 내가 만난 사람과 자연과 풍경들 속에서 답을 찾아본다.
이 세상에 그저 필요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것이 생명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존재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서로 관계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 존재감을 확인받기도 하고,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혼자된 시간도 필요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며 세상사의 묵은 때를 정기적으로 벗겨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저 균형이 필요했던 것 뿐이다.
너무 사람에게 기대하고, 의존하고, 욕심내고 집중하다보면 다치게 되고, 힘들어진다.
그러면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고, 자연을 보며 환기의 시간을 가지면서 다시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어린 형제가 옆을 지나간다.
어딘가에서 캠프가 있는지 형아처럼 보이는 어린 아이가 큰 가방과 주머니 가방을 들고 더 어린 동생이 잘 따라오는지 살펴가며 부지런히 길을 간다.
자신보다 조금 더 큰 형아에게 좀더 많은 짐을 맡겼으나 그 어린 것도 자신의 작은 가방을 메고 간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에게도 자신에게 맞는 짐을 지며 길을 가듯 어른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많이 버거운 삶의 무게가 느껴질 때는 사람들에게 함께 지기를 부탁하지만 결국은 내 삶의 무게의 주인은 나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리라.
누구나 다 자신의 삶의 무게가 버겁다.
조금의 여유가 있을 뿐 관계에서 생기는 정으로 그 여유를 조금 나눠 줄 수 있을 뿐 모두 인생은 두렵고 외롭다.
너무 나의 체중을 실어 의지하지 않기.
그렇게 균형을 맞춰가며 지내면 된다.
이른 아침 두 모녀는 수퍼를 다녀오는 모양이다.
일찍 일어난 어린 딸이 보채서 나왔으리라.
어린 딸을 어르기 위해 사주었을 과자.
과자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부녀는 눈맞춤을 하며 오순도순 즐겁다.
너무 겁쟁이라고, 어리광쟁이라고, 실수투성이 못난이라고 몰아세우고 혼내기만 했던 내 자신을 괜찮다고..
다 실수도 하고, 사과도 하면서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니 괜찮다고..
너무 두려워하고, 겁먹지 말라고...
흔들리기도 하고, 넘어지면서 균형을 잡아가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달래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