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서 창문을 만드는 거예요. 대문처럼 크게 만들면 누가 들어오니까 작게, 또 대문처럼 크게 만들면 자신이 못 견디고 아무나 만나러 나갈까 봐 작게, 그렇게 창문을 만드는 거예요. 엿보려고 말이지요. 몸으로 만나지는 말고 그저 눈으로 저기 사람이 사는구나... 그림자라도 서로 만나려고.... 아니 그림자만 얽히려고, 그래야 아프지 않으니까 그림자는 상처 받지 않으니까.
-착한 여자 중-
171 에로틱
에로틱이라는 것이 결코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오르가 습은 육체로 시작해서 정신의 황홀을 합일시키는 것이고 수도라는 것은 정신을 통해 육체를 초월하고 그리하며 마침내 육체의 긍정조차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섹스라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둘이 행했던 사랑의 행위였다. 하느님은, 둘이 알몸으로 부둥켜안는 것을 보시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라고 기뻐하며 축복해 주셨다. 그런데 섹스는 남자와 여자의 성기에 갇힌 채로, 이제 갈비뼈 한 대의 인연도 없이 유리 진열장에 서서, 몇 푼에 사고 팔리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시(時)'와 피조물이라는 뜻의 '사람'의 어원은 같다. 둘 다 'poiesis'인 것이다. 내 작품 중 하나를, 설사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못 만든 것이고 내 생각에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누군가 모욕했을 때의 분노를 안다. 그것은 그 글을 쓴 나에 대한 모독이니까.
그러니 신의 시(時)인 사람을 사람이 모욕했을 때 우리가 신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 그러니 예수님이 "너희가 가장 작은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신 것은 혹여 아닐까.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중-
'공지영'이라는 작가는 20년도 넘은 오래전에 '봉순이 언니'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책을 읽었던 것으로 작가를 기억한다. 그리 좋지도, 싫지도 않았던 기억으로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라는 책을 중고서점에서 그리 큰 거부감 없이 집어 들게 했다.
지금까지 작가가 써 왔던 많은 장르의 책 내용 중 '상처'라는 주제가 들어 간 부분을 발췌해서 수록해 놓았다. 꽤 유려한 글이 보기 좋았고, 편안하게 읽혀서 좋았다.
가끔 그렇게 와 닿는 글 밑에 내 생각을 끄적거려 보다가 글을 정리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요즘 뉴스에 자주 작가의 이름이 들려와서 그 기사들을 읽게 되었다. 작가의 경솔한 발언들에 대한 기사가 주를 이루었고 곧 책에 대한 호감도가 추락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은 서지 않지만 책의 반 이상을 읽은 상태였고 독서의 즐거움이 이미 반감된 상태였다.
작가가 쏟아냈던 미성숙하고 경솔한 발언들이 자꾸만 집중력을 흐리게 만들었고 잠시 책을 덮었다.
'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했다.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일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부? 전부가 아닌, 일부라는 뜻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둘. 많은 책들이 나에게 말을 해 주었었다. 글이라는 것은 진정성이 있어야 독자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고. 그럼... 이 책은 반쪽짜리인가?
책을 읽는 내내 많은 방해를 받기는 했지만 책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많은 부분을 공감했고, 이제껏 내가 고민했던 부분에 대한 답도 조금 얻었다는 생각에 그리 후회되는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성에 대한 이야기였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성과 사랑, 그리고 관계, 거기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상처, 그리고 인간 또는 사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해 보았을 작가의 생각을 짧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요즘 누군가를 '안다', 어떤 감정에 대해서 '안다'라는 주제에 대해 골똘히 자주 생각해 보곤 한다.
요즘처럼 온라인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관계의 첫 시작을 온라인의 작은 창을 통해 누군가를 바라보고, 상대 또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협소한 자신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는 관계에서 우리는 과연 서로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도 모른다.
그러면 오프라인으로 시작된 관계에서는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수 있는가? 그 또한 상대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보여줄 수 있기는 마찬가지이며 단지, 상대의 표정과 행동, 말투 등을 보면서 그 진의 여부를 판단할 다양한 source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차이 말고는 온오프로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를 알 수 있는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일부만 안다는 것, 그 사람의 전체를 모른다는 것은 '안다'보다는 '모른다'에 가까운 뜻이라고 생각한다.
'모른다'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그것은 두려움이고, 불안감이다. 그래서 그 뒤에는 항상 '조심성'이라는 행동방향의 단어가 뒤따른다.
요즘은 뉴스나 언론보다는 SNS에서 정보를 더 빨리 접하게 되고, 그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소통하기도 하며 싸우기도 한다. 정보나 사람에 대한 앎의 창구가 훨씬 더 좁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전부를 알 수는 없어도, 전체를 보려고 하는 노력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 누군가를 판단하고, 싫어할 자유가 있지만 누군가를 상처 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신의 피조물인 각 개인의 고유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 사람의 실수, 잘못은 그 상황과 그 당시의 사실에 대한 비난을 될 수 있어도,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책의 중간중간에 붙은 색색깔 밴드들이 말해 주듯 이 책은 많은 부분 나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부분 상처를 싸매 주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 경솔한 판단을 경계하기 위한 근본적인 사고의 행동방향을 책을 읽는 내내 오랜 시간 사유할 기회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