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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지는 별 Sep 01. 2020

우리, 각자, 서로(독박 육아에 대해)

82년생 김지영 영화 후기(스포 주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영화라는 걸 알만큼 유명한 영화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그렇게 시끄러운가 싶어 무심히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1982년 봄에 태어난 지영은 70년대의 시간을 살았던 나와 비슷하게 '여자'라는 차별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가슴 졸이며 입사지원을 했던 회사에 합격을 했고 이후 평범한 직장인이 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현을 만나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다. 이후  그에 따라오는 수순처럼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할 수 없어 여자인 지영이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 몰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영에게 빙의가 찾아오고, 그 사실을 지영은 모른 채 명절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댁에 내려간다.  차례를 지내고 지영이  친정으로 가려고 할 때 즈음해서  시누이 내외와 아이가 들이닥친다.

시어머니는 시댁에서 고생했을 자신의 딸에게는 앉아 있으라 하고 지영에게 이것저것 음식을 내오라고 시킨다.  

그러자 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지영의 친정엄마에 빙의되어 시어머니에게 지영이도 지영의 엄마에게 소중한 딸자식임을 헤아려 달라고 이야기한다.

놀란 시댁 식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대현은 대충 둘러대고 지영을 데리고 차를 타고 와 버린다.

걱정이 깊어가는 대현은 지영의 건망증을 핑계 삼아 정신과 상담을 권한다.
그러나 지영은 복직을 결심하고 베이비시터를 구하지 못해서 마음이 심란한데 대현이 복직은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다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것'이라는 말에 지영은 지금까지 눌려져 있었던 감정이 폭발하고야 만다.

"너 생각해서 그런다는 말 좀 그만해!!!  그렇게 말해도 다 한 치 건너서의 일이잖아.  나만 전쟁이야!!"

라며 그렁그렁 눈물 고인 얼굴로 지영이 소리 지른다.
지영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누군가에게 소리라도 지를 수 있어서 다행이네. '나만의 전쟁'... 진정한 나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보다 지영이는 마음 착한 대현도 있고 좋겠다....'

같은 직장인 여자로 아이 양육을 병행하며 사는 일은 싱글맘인 나나 지영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이기에  '나만의 전쟁'이라는 지영의 말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한 지영의 절규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다  대현은 지영의 빙의 사실을 조용히 알려 준다.
그때서야 대현이 지영에게 왜 그렇게 병원 상담을 종용했는지 그리고 복직을 미루려고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면서 지영은 '고생했겠다'라며 대현의 손을 토닥인다.
여느 부부라면 당연한 이 장면에서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대현은 지영의 위로의 말에 '너 잘 못 될까 봐... 너 나랑 결혼해서 나 때문에 아픈 것 같아서....'라며 흐느껴 우는 모습은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로서의 지영이 아닌,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걱정하는 한 남자의 눈물로 다가왔다.
과연 결혼이란, 부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이어졌다.

남녀평등의 가치로 가사노동을 정확히 분담하는 일도 결혼이라는, 生活(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필수적인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현이 지영을 여자로서 사랑하고 위하는 그 마음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더 이상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닌, 기능적으로 각자의 역할만을 해 내야 하는 목적의 관계, 계약의 관계로 가기까지 저마다 다 다른 숨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을 지키며 새끼를 키워내는 아비와 어미의 이름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교감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욕구가 충족되어도 결혼과 육아, 그리고 생활을 견디고 고비고비를 넘기는 일이 쉽지 않은데 그저 관계와 공통된 목표만을 위한 존재라고 한다면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툼은 더욱 잦아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한 공간에 살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서로 다른 곳을 보게 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대현이 지영을 걱정했던 마음과 지영이 그의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인 그 장면이 어쩌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해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혼을 지속한 시간에 상관없이 누군들 한 공간에서 나 아닌,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일이 쉽겠는가?

싸울 때도 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그 지루한 싸움에 지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수시로 서로의 관계를 돌아보고,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타협하는 능력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꾸 자신이 희생하고, 양보한 시간이 억울해지기 시작하고 그때부터는 상대에게도 자신이 희생했 듯 같은 크기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신혼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고 지영은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시댁에서 아이를 갖기를 원했을 때 지영이도 그랬다.

아무리 대현이 육아를 함께 한다고 해도 결국은 여자인, 지영이 더 많은 희생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고 지영이도 일을 하고 있는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어 직장을 퇴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시대에 누가 더 육아를 잘하느냐는 性(성)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여자보다 남자의 급여가 더 많다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지영도 그렇게 직장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청소를 하고, 대현을 기다리는 일상.
지영이 멍한 눈으로 베란다에 서 있는 모습과 세탁기 앞에서 멍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에서 나는 지영이 점점 어딘가 고장 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하는 일 또한 엄연한 직장,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꼭 집이 아닌, 직장이라고 해도 그곳에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질수록 사람은 어딘가 고장 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빙의 사실을 알고 난 후 지영의 과거 팀장이었던 사장에게 '정신과 치료'를 이유로 복직 거절 의사를 밝히자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요즘 사람들 병원 안 다니는 게 용하지."

나는 이 말에서 봇물 터지듯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지영도 누군가를 탓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지만 입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이미 마음과 정신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내 커리어는 둘째 치고라도 어미로서 새끼를 길러내기 위해 다니는 직장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무작위의 사람들에게 만신창이가 되어 퇴근과 출근을 반복했다.

그렇게 1년을 넘긴 어느 날, 눈 밑이 하루 종일 떨리는 증상이 일주일 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신경과에서 시작된 투약이 정신과로 전과되었고 나는 3개월의 투약을 하며 어느 순간 팽팽해진 고무줄이 끊어지 듯 내 정신적인 인내심과 버텨내기 위한 노력의 끈을 놓아 버렸다.

악몽을 수없이 꾸고, 가슴통증이 계속되었다.  잠을 잘 수 없었고 직장에서는 조증과 울증이 교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시세끼 챙겨 먹 듯, 아침과 점심 그리고 오후를 연 이어 민원이 발생했고 나는 전화 민원과 전화 종료 후 폭발하는 감정을 이길 수 없어 전화기를 부서져라 던져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의 밥을 챙겨 주고 불을 끄고 앉은 내 방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열심히 버티고 사는 나에게 세상은 기회를 주지 않아. 언제까지 이렇게 나만 힘들어야 하는 건데?!!
 나보고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그래? 내가 죽으면 속이 시원해지는 거지?' 울분이 삭여지지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병원으로 갔다.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주치의가 의뢰서를 써 주었다.

나는 직장에 진단서를 제출했고, 바로 병가에 들어갔다.  자식을 키우면서 먹고살기 위해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살아야 하나, 직장이라는 것이  나 인격까지 파괴되도록 그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속으로 반복했고,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다.

지영의 과거 팀장인 그 여자도 그랬다.
좋은 엄마이기는 아예 처음부터 포기했고, 위로 위로 승진할수록 남자들이 판을 끌고 가는 전쟁 같은 그곳에서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살아남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살아남았다'는 말은 생명의 위협과 닿아있는 단어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위에 했던 하소연들-인격이 파괴되도록 그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아도 괜찮은 건지-이 철없는 아이가 떼쓰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전쟁인 것이었다.  먹고사는 일은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인 것이다.

그렇게 치면 과거 사냥을 나서며  돌아올 때는 지금 함께 나가는 그 누군가는 같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사냥을 하던 그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을 위해, 새끼를 키우기 위해 식량을 구하고, 사냥하면서 내 자신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렇게 생각하니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딘가를 희생당하는 일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뜻으로 들렸던 팀장의 말이 더 아프게 와 닿았다.  





후일 대현은 육아휴직을 내고 지영은 우편함에서 자신의 글이 채택된 책을 펼쳐 들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를 탄다.  거실의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타닥타닥 글을 쓰는 장면에서 이 영화는 끝이 난다.

희망과 기대, 그리고 미래가 보이는 듯 느껴지는 지영의 그 구두 소리와 글을 쓰는 타이핑 소리... 지영은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그 순간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듯 보였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존재이기에 나 또한 지금처럼 어려운 시국에 제대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이라는 것을 다니고 있음에 고맙고, 다행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함이 옳을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병가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나는 복직을 하겠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에 대해서는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결심을 했다.

지영이 힘들지만 말없이 육아에 전념하면서 자신도 병들고, 의도치 않게 자신은 피해자로, 대현은 가해자로 만들게 된 이유는 바로 적극적으로 자신이 힘들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하지 않은 잘 못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나 또한 지영처럼 그랬었다.  

18년을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아이들 아빠에게 적극적으로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내 억울함은 내가 적극적인 요청이 없는 내 잘못도 없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인지하게 되었다.

육아는 둘이어도, 혼자여도 힘듦의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버겁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우리 가족은  힘겨운 적응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한 사람의 희생에 대한 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그 휴식과 회복을 위해서는 아이들의 아빠의 적극적인 역할과 활동이 필요했다.  아이들은  이때까지의 당연한 평화로움과 배려가 사라지니 아빠랑 못 살겠다는 둥, 빨리 독립을 하겠다는 둥 불만을 터트렸다.  하지만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것은 결핍과 상실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기에 아이들을 다독인다.

둘이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둘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 , 부지런히 촉각을 세우며 서로 소통하는 일이 중요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도움이 필요할 때 지금은 남녀로서의 관계는 끝났으나, 각자의 엄마,아빠라는 이름의 책임은 나눠가져야 함이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꼭 둘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육아가 짐이 아닌, 책임의 개념으로 다가와야 하고, 공동의 협업이 되어야 아이도, 부모도 중심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이혼으로 인해 나처럼 혼자서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혼의 과정이 순탄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남녀로서, 부모로서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의 자리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한쪽에서 요구하든, 자발적으로 손을 내밀든.
그 누구도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움이 필요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상대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익숙하지 않은 상대에 대해 많은 기대는 접되, 많은 정보를 공유하자.

그리고 아이에게도 이제까지 익숙했던 방식으로 바라보지 말고, 어른이어도 처음은 언제나 서툴고, 그로 인한 불편함은 당연한 과정 중의 하나임을 인지시키자.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다고 화를 터트리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낯섦에 익숙해지는 과정임을 이야기하자.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꼭 아이들과 아이들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식사도 한다.
한쪽 이야기만 들으면 불만과 오해의 소지가 커지지만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농담처럼 가벼움이 있는 대화의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으로서는 마음이 닫혔지만 협업자로서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여기기에 아이들에게는 그의 서툼과 걱정, 불안함에 대한 이해를 구한다.

아이들도 안다.
그리고 이해해 준다. 부모도, 어른도 처음은 다 힘들고, 서툴다는 것을.

그 누구도 처음부터 쉬웠고, 잘했던 부모는 없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능숙해졌고, 능숙해져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육아라는 사실을 피차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여러 과정을 통해 성장하듯, 부모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 그리고 자식들과 같이 부딪히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제도로 '우리'가 되었다가 이혼으로 '각자'가 되었어도, 육아의 공동책임으로 다시 '서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플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서로 생채기를 물어뜯기보다 닦아주고, 싸매 주면서 서로 짐을 나눠 드는 동지처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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