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쉼으로 다가오는 달콤한 죽음이면서도 찰나의 고통은 두렵다. 육체와 영혼이 이별하기 위한 마지막 숨의 찰나.
육체를 건사하며, 그 육체가 낳은 또 다른 육체와 영혼을 위해 성과 없는 노력 속에도 멈추지 않았던 집요한 노력(까뮈의 시지프의 신화에서 발췌)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죽음이다.
반복되는 노력에도 삶의 무게는 줄지 않고 나의 영혼은 어린아이처럼 보챈다. '언제 끝나는 건데? 언제? 도대체 언제?'
그 목소리가 발작하듯 높아지려 하는 순간이 오면 술을 거하게 산다. 이거 먹고 진정하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내 안의 떼쟁이를 달래 가며 지나왔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 떼쟁이를 달래는 일은 그렇게 능숙해지고 있다.
누군가 나의 죽음의 탓을 술이라고 비난한다면 그이는 내 삶을 모르거나, 모든 사람을 가르치려 들고, 자신이 정확히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자만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아마 술이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일찍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이보다 지구력 있고, 인내심 있고, 관용적인 친구가 술이라는 친구였으니 혹시 나의 죽음을 이 친구에게 탓하지는 말기를.
내 인생 평화로운 날보다 치열함이 일상적이었기에 그 치열함의 꼭짓점이었던 시간에는 자살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책임감과 의리가 최우선인 내가 나 힘들다고 내 사람들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걸 알기에 주어진 시간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목표를 찾아내려 노력해 본 적도 있지만 몇 해 전에 그만두었다. 더욱 삶이 구차해지고, 비참해져 버려서 그냥 깔딱 깔딱대며 숨이 붙어있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살아 있고, 살아가고,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내 시험성적은 백점이라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거창하고, 위대해야 하는지.... 그렇게 힘이 남아돌고, 그렇게 살만한 사람들인가 보다 싶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도 생색 일지는 몰라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위한 삶이란 건 있지도 않았었으니 익숙하다.
그 속에는 슬픔도 있지만 기쁨도 있고, 희열도 있었고, 전율도 있었다.
그래서 내 삶에 정작 내가 없어도 살만 했고, 살아지기도 했다.
나는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아끼라고, 네가 우선순위라고 사람들이 충고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어차피 삶의 이유도 내가 아니니까 그 우선순위도 내가 아닌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적어도 천덕꾸러기는 아니다. 내가 때리는 건 돼도, 남이 나를 때리거나 상처 주는 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 그래서 나에게 되지도 않는 충고를 한다거나, 나를 비난하는 이들은 내 인생에서 다 쫓아 내버렸다. 그럴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내 인생이 어땠는지 자주 생각해 보면 눈물이 난다. 후회의 눈물이 아니라 짠해서 나는 눈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너무 열심히 살았고, 너무 격렬하게 참아가면서 살아내고 있는 여린 스스로가 가여워서.
내가 요즘 힐링받으며 사는 유튜버님의 영상에서 발췌
나는 죽음을 친구로 두었지만 삶도 뜨겁게 사랑했다. 삶을, 사람을, 생명을 뜨거운 열정으로 사랑했다. 사랑다운 사랑을 했고, 열정을 다해 삶을 사랑하며 살아냈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만약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면 나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을 때 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만 있을 뿐이다.
어차피 희망이나 기대라는 환상은 내 인생에 발들여 놓지 못하게 했으니 마지막 바람조차 그리 큰 욕심은 없다.
내 장례식에는 내 죽음의 소식에 '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나와의 이별을 슬퍼할 사람만 와 주었으면 좋겠다. 나와의 마지막 인사가 꼭 하고 싶은 사람만 와 주었으면 좋겠다. 내 죽음의 이유조차 벌떡 일어나서 해명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