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하고 많은, 그리고 거의 모든 상황에 코로나-19는 각박함의 어두운 구름을 세상 가까이 끌어다 놓았다. 모두 각자의 힘듬이 가장 절실하다고 말하고 가장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본인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루에도 백번 넘게 날카롭게 날 선 칼날 앞에 보이지 않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다.
오늘도 20년은 아래의 청년에게 날카로운 단도 같은 말을 주고받고 진정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행정에 대해 수긍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나의 말투와 억양에 대해 불쾌하다고 말했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인가? 최대한 노력은 하겠지만 기분 나쁘다면 미안하다고, 하지만 나도 감정이 상하기에 조절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과연 친절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 기준은 오롯이 서비스를 받는 이에게만 맞춰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 민원을 대하며 12년을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최대한 수긍이 가능하도록 해명에 가까운 설명을 했음에도 절대 수긍하지 않겠다는 그 청년의 의지처럼 나 또한 무조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어투와 어조, 그리고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이 기준에 절대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늘 '부당하다'라는 생각 속에 어떻게 하면 그들의 칼에 베이지 않을까 고심하며 그들의 칼춤을 피해 다닌다
아침에 전화해서 본인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전화를 하는 사람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여리디 여린 직원의 눈물을 보며 가슴에 찌르르... 찌르르 전기가 온다. 그리고 애걸복걸하는 직원들... 제발 그만 좀 하시라고...
인간다움은, 사람스러움은 내가 원하는 답이든, 원치 않는 답이든 그 앞에서도 예의와 존중을 잃지 않는 것이다.
원치 않는 답이라고 한다면 다른 방법을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한다. 한 통의 지루한 전화통화로 편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모멸감을 주고, 모욕을 하며, 언성을 높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것을 그저 감수하고 어떤 말이든 감정 기복 없이 들어야 하고, 수긍해 줘야 하고, 본인들이 하고 싶은 만큼 다 쏟을 때까지 그 오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다 뒤집어쓰라는 것은 폭력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사람을 사람스럽게 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하다. 어떤 상대이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함부로 대하고, 원하는 것을 줄 때까지 본인의 감정을 터트려도 되는 존재는 없다.
자신도 그저 쉽게 상처 받고 자주 화가 날 수 있는 인간이듯 감정노동자도 아이언맨이 아닌 인간이다.
어디서부터 우리는 잘못된 것일까? '예스'라는 답만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지금의 이 시간이 나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모든 상황들이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에 너무 힘들다. 중심을 잡으려고 해도 반복되는 단도의 짧은 칼날 앞에 픽픽 힘없이 스러진다.
아침에 일어나 앉아 조금 시간이 지나니 아랫입술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더니 멈추지 않는다. 어제의 극도의 스트레스를 잊을 수 없다는 몸의 말이다. 정직한 나의 정신과 몸. 아직 난 살아있다.
당직 출근을 앞두고 정기적인 정신과 진료를 하고 돌아와 잠시 공원에 와서 간단한 식사를 한다. 담당의사의 진심 어린 공감이 공원 가득한 미풍처럼 피떡진 마음을 녹여준다.
어쩔 수 없는 생계의 일이 아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며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출근한다. 언제 끝나냐는 투정은 고이 접어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