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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지는 별 Sep 25. 2021

일상 속에는 죽음에 대한 저항이 늘 깔려 있다.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책 리뷰

쿵쿵 쿵쿵 가볍고 둔탁한 소리가 공원에 울려 퍼진다. 시간차를 두고 돌아보니 실버카를 끌고 왔던 할머니가 다리를 구르는 소리였다. 시종이 걸렸는지 잠시 뒤 할머니는  실버카를 의지해 천천히 작은 공원을 평화롭게 맴돈다.

그 뒤를 따르는 장애가 있어 보이는 아가씨.

그녀 옆에는 가족 같아 보이지는 않는 30대 여인이 그녀와 함께  다소 과장스러운 발걸음을 콩콩대며 공원을 돈다.  



그들의 반복되는 움직임을 무심히 귀 옆으로 흘리며 모닝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본다.  밤에만 우는 줄 알았던 귀뚜라미는 풀숲에서 이른 아침 닭울음처럼 규칙적으로 울어댄다.  파르르 바람결에 푸른 잎사귀를 떨어대는 청명한 아침.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휴식의 첫 아침이다.


정신에서 검붉은 기운이 넘쳐나니 육체도 망가지기 시작했고 끓어오르는 분노와 서러움이 자기 멋대로 밀려 나오는 통에 나의 담당의사는 '병가'라는 달콤한 휴식을 선물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시간이다. 숱하게 포기하고 싶었던 생활과 삶의 굴레에서 나를 잠시 이탈시켜 숨을 쉬게 해 주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작은 공원을 탑돌이 하듯 조용히 자신의 속도대로 걷는 저들의 발걸음도 조용히 호흡하며 한줄한줄 읽어 내려가는 책도 죽음이라는 깊고, 어두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한 작은 노력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아직은 아니다는 답으로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죽음을 유보하고자 자신의 작은 의지를 쥐어짜 내 보는 것이리라.


'아침의 피아노'라는 책은 철학자였던 김진영 교수가  죽음을 맞이해  그 스스로 소멸해가는 중에 쓴 글을 엮어서 만든 책이다. 오래전에 사두었으나 얇고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올 만큼 많지도 않건만 나는 그의 마지막 흔적을 후루루 읽어 버리기가 싫어서 한참을 묵혀 두었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시간 앞에 사랑을 말하고, 자신이 존재를 입 중하는 일 또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한다.


더 오래 살아야 하는 건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미루었던 일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애써 이 불가능한 삶과의 투쟁이 무슨 소용인가. -072p-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나와 나의 다정한 사람들, 미워하면서도 사실은 깊이 사랑했던 세상에 대해서 나만이 쓸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075p-


모두들 모든 것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077p-


유한함, 촉박한 시간이 남겨졌을 때 그는 최대한 남은 의무에 대해 끝까지 투쟁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쓰며 유한한 시간에 대해 절절한 마음으로 사랑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생각과 마음처럼 나 또한 아직은 많이 사랑하고 애틋한 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지키고, 그들에게 갚아야 할 의무와 책임을 위해 나는 더 노력해야 함을 깨닫는다.  충만하게 행복했던, 사랑했던 적이 언제였더라?  그저 이렇게 연명하듯 삶을 살아야 할지, 포기해야 할지, 왜 계속 살아내야 할지에 대한 어지러운 질문 속에서 나는 무한반복 맴을 돌고 있다.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억지스러운 충동 속에 현실적인 삶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의 안녕이 내 사람들이 안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얼마 주어지지 않은 시간에 마음이 무척이나 소란스럽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다는 아우성의 소리들.... 하지만 나도 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걸...


무르익은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무르익었다. -112p-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119p-


비 내리는 아침,조용한 하루가 편지처럼 펼쳐지고 있다.  오래 기다린 편지가 도착하는 아침.  지금 나를 찾아와 포옹하는 사랑의 아침.  수동적 위안이 아니라 능동적 환대의 시간. -124p-


몸이 가고자 하는 길을 열어줄 것.  그것이 생의 기쁨이 가려는 길이다. -129p-



무르익어서 소멸하는 존재, 그리고 삶을 파티하듯 우아한 손님처럼 살다 죽음을 환대하는 그의 삶...내게는 너무도 거리감이 있어 공감을 할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그의 지나온 삶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천둥 벌거숭이처럼 세상에 뚝 떨어져서 닥치는대로 치열하게 생존하고,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직장을 다녔지만 10년 넘게 다닌 직장에서의 대우는 상처 뿐이었던 나에게는  그의 고상하고, 우아한 삶은 무척이나  낯설 수 밖에.



그래도 아름다운 말이다.

동경하고 싶은 말이다.  아직 내게 시간이 남아 있다면 충분히 작가의 말처럼 우아하고, 고고하고, 평화롭게 살다 죽음을 환대하고 싶다.

동경하는 죽음에 대해서 처음 생각해 본 구절이다.



책의 중반에는 거의 '사랑'에 대한 절규와 같은 단문의 글들이 가득하다.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괜찮아........


내가 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나는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사랑할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힘이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무한한 지금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오고 만들지 지금은 모른다.


특별하고, 귀한 '나'의 존재. 마지막까지 사랑할 의무를 지키고 다가오지 않은 죽음과 두려움에 떨지 말고 지금을 살라는 작가의 뜨겁고 용기있는 위로를 얻으며 지금 마음 속의 요란한 회오리를 잠재워 본다.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지금 여기에는 있는 것일까? 아직은 아니라고...했지만 나는 열심히 여기저기 기웃거려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나의 사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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