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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지는 별 Jul 06. 2021

왜 그런 얼굴로 태어났느냐 묻지 않듯이

마음의 병을 마주하다



반복되는 슬픔과 우울을 철저히 가면으로 숨긴 일상을 살다가 말이 되면 직장내에 있는  심리상담을 정기적으로 가고 있다.


오늘도 나는 무엇이 그렇게 서러워 상담 내내 일그러지는 입술로 고장 난 수도꼭지 마냥 눈물을 줄줄 흘리다 왔다.


내게 세상이라는 곳은 겁쟁이 울보 아이가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발작하듯이 울 때  "아... 너는 왜 이러니? 왜 허구한 날 우는데?.... 제발 바보같이 그만 좀 울어!!!, 똑바로 서!!"라고 말하는 엄마와 같다.

집에 도착해 허기진 배를 채우며 메모노트에 휘갈겨 쓴 글이다.


 선생님은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고 나는 '사람들이 너무 멀쩡해 보인다'는 말이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지금 나에게는 사람들 걱정에서 나오는 진심 어린 충고도, 좋은 말이 가득한 책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하는 좋은 말들도 모두 통증으로 읽혀서 지금은 아무것도 읽거나, 보거나, 만나지 않는, 철저하게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말했다.

나는 질병코드 F31.8 양극성 정동장애, 쉽게 말해 조울증을 앓고 있다.  열악한 직장생활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이 질환을  진단받았지만 여러 검사와 상담을 통해 아마 어렸을 때부터 잠재되어 있었던 질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늘 즐겁고, 유쾌한 아이.

힘들 텐데도 씩씩하고, 에너지 넘치는 아이.

주변에 사람들이 북적대고, 끼가 넘쳐 보이는 아이.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나'를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지독히도 외롭고, 우울한 아이였다.  리지만 짙은 어두움의 그림자는 거대하고 짙었다.

그 거대한 크기만큼 사람들이 허기졌고, 그리움은 집착에 비례되는만큼  관계에 매달렸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의 상처는  커져가어린 나는 자주 절망했었다.  


관계가 나빠질까 봐 혹은 상처 받은 내가 부담이 될까 두려워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괜찮은 척, 아프지 않은 척 가면을 집어 들었고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답습되는 관계에 대한 절망감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냉철해짐과 동시에 외로움을 가장 가까운 내 친구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관계에 기대지 않기 위해 만남을 피했고, 마음을 닫아걸었고 이후 생계를 위해 만나는 직장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필요에 의한 정도만큼만 관계를 하기에 그 점도는 약했고 그래서 편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생기는 감당 못할 상황에도 의연히 상황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괜찮다는 가면을 자주 쓰는 것이 큰 문제였다. 반복되는 상황에 나는 병이 나고 말았다. 이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고 복직했고, 상황이 바뀌었지만 몸과 마음이 지옥이었다.


먹는 밥의 양만큼 약을 먹었고, 약을 먹을수록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아서 힘들었다.  더해지는 불면증과 알 수 없는 통증에 불안하고 아팠지만 의사들 조차 자신이 처방한 약과는 상관없는 증상이라고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의 일상은 평화로워야 했고, 순탄해야 했다.  가면을 쓰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나는 약을 임의로 중단했다.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는 의사들의 약을 먹기가 싫었다.  


괜찮지가 않은 날이 이어졌고 나는 간간히 내가 최대한 가면을 집어 들지 않아도 되는 상담 선생님과의 시간만이 내 병을 공기 중에 노출시켜 상처를 벌려서 열어 놓게 되었. 투약을 임의로 중단한 나를 심리상담사 선생님은  걱정했지만 나는 다시 투약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고 지금 또한 약을 먹지 않고 있. 같은 의료 쪽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그들이  신뢰가 가지 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답을 갖고 있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 정확한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나 또한 그렇기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지만 천천히 그 답을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나처럼  마음이 안 괜찮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여러 곳의 정보를 접하면서 생각보다 괜찮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아픈 마음으로 지금을 사는 그들의 글도 보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들어 보고,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 예술의 길을 갔던 그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그 사람들의 일상은 무척이나 버거운 일들이 가득했지만 그들이 이뤄놓은 많은 결과물도 있었고, 자신의 병을 자신만의 방법대로 조절해 가며 살아가는 사람, 나처럼 급성기에 어쩔 줄 모르지만 위태위태하게라도 주어진 시간을 걷는 사람, 반복되는 병에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 등등의 다양한 이야기를 보았다.


그 글들을 보면서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 삼담사선샘님께서  오랜 상담 중에도 지켜드리지 못한 환자들이 있었지만 나만큼은 오래오래 천천히 함께 하자는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환자라는 병명을 진단받았든, 그렇지 않든 대한민국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주 '죽음'을 떠올린다.  단지 그것은 자발적이냐, 자연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괜찮은 날보다 괜찮지가 않은 날이 더 많은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괜찮음과 안 괜찮음을 경계를 넘나들면서.



경계성境界性

잦은 통증과 불편함 거기에 더해 모멸감, 슬픔, 우울이 무게감을 얹어 주는 일상이 반복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는 더욱 자주 죽음과 생을 자주 왔다 갔다 한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상황이 기다리지만 죽음이란 것은 그 결과가 부정적인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기에 경솔하거나 무책임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주는 죽음도 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면 결국은 죽음조차도 이기적일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삶을 선택하고 그 삶을 견디고, 죽음을 참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나의 죽음으로 누군가가 얼마큼 힘들어하고, 슬퍼할지가 떠올라서 죽음을 자주 유보한다.


그렇다면 그 가족은 말할 것도 없이 주변인 또한 그 유보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 도움은 생각보다 낯설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마음의 병은 병소病巢가 국한되어 있지 않음에 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곳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라는 곳은 사람이 각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듯 그 마음의 얼굴도 각기 다르게 생김과 동시에 그 성격 또한 많은 다양성을 지닌다. 수많은 마음의 모양을 가진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치료한다고 해도 완치보다는 재발이 잦다.

마음의 모양, 마음의 얼굴.

왜 그런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묻지 안 듯, 왜 그런 병을 앓게 되었냐고 묻지 말자.  


그들이 약해서라기 보다, 그들이 당신보다 조금 오랫동안, 그리고 더 자주 비슷한 통증을 반복했고,  건강과 병의 경계를 자주 넘나들었다는 차이일 뿐이다.  정신병, 마음의 병을 특별한 사람들만 앓을 것이라는 단단한 생각에 정釘을 박아 보자.  


고혈압, 당뇨환자가 자신의 질환을 부끄러워하지 안 듯, 정신병 또한 괜찮다는 가면을 마음 편히 벗어 아픈 얼굴의 민낯을 보여 줄 수 생각의 전환이 지금보다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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