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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지는 별 Sep 05. 2021

무지개 따위 바라지 않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 책리뷰

"선생님.. 이제 저는 제가 진짜 아픈 건지... 병 뒤에 숨어있는 건지조차도 판단이 서지 않아요.  그런 생각조차 집중하는 일이 피곤해요.  그냥 의미를 두고,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일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어쨌든 내일 울지 않고 출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오랜만에 심리상담시간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했던 말이다.  2년이 넘어가고 있는 코로나-19의 상황에 다들 지쳐 나가떨어지고 있다.  직원들 모두가 서너 달을 넘기지 않고 여기저기 기계부품처럼 반복되는 발령에 적응하느라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면서 지낸다.  


출근해 내 자리를 찾아가는 길에 지나치는 여러 사람들의 책상에는 약봉투들이 널려있다.  9월 대대적인 인사가 났고, 현부서에 네 명이 병가와 휴직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갓 입사한 신입들은 시간 안에 명부를 완성하기 위해 이틀 사이에 폭삭 늙었다. 더 이상 현 정부의 뉴스 한 줄을 위해 공무원을 갈아 넣지 말라며 노조는 파업을 선언했다.  


아수라장이다.

너의 작은 한 몸 편히 쉴 곳 없는 세상...나도 그렇단다..아가...

지인의 책 후기를 보다가 바로 구입해 버린 '피로사회'라는 책은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지금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듯하여 끓어오르는 울분을 토닥이며 보아야 했던 책이다.

제목에서 이미 느껴지듯이 책에서는 소진증후군과 우울증을 자주 다룬다.  



소진 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병들게 하는 것은.....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 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규율 사회의 피안에서 (27-28p)


깜빡 깜빡이며 그래도 불이 들어왔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전원이 나가버린 상태라고  말한다.  전원이 나갔는데 잔열으로라도 기계를 돌리는 듯한 느낌... 한없이 잔인하다.

잔열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나는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굴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한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사색적 삶 vita contemplativa"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물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 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사색하는 상태에서만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침잠할 수 있는 것이다.     

                                             - 깊은 심심함 중 발췌(34-35p)


생계와 직결되는 일,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과 상관이 없고, 생산성과 직결되지 않는 사치스러운 활동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혀 올 때 쉼보다 무엇을 하여 숨통을 터주어야 하나 고민했던 일이 생존의 본능과 가깝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생존하기 위해 나는 짧게는 5분, 길게는 30분 정도를 장소를 불문하고 명상을 한다.  거창한 명상이 아닌, 그저 눈을 감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생각보다 어려운 명상의 시간을 통해 그득히 차 있는 불편한 마음을 조금씩 덜어낸다.  



피곤해도 잠들 수 없는 날이 반복되었고, 그저 잠이 올 날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왔다.  병원을 가야 했고, 휴가를 내야 했다.  상사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그저 지원근무를 나와있는 계약직내게 그 물음은 그저 감기몸살 정도의 답이었으면 좋으련만 '정신과'를 가야 한다는 예상 밖의 말에  상사는  말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 있는 사람들 멀쩡한 사람들 없어.. 그래도 자기 정도로 일 하는 거면 상태 그렇게 나쁜 거 아니야."


 그런 말을 왜 했을까 궁금했다.  악의나 저의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마음이 복잡해졌다.


상사의 '그 정도면 멀쩡한 거'라는 말에서 과연 안 멀쩡한 상태란 어느 정도란 것일까? 정말 '과로사'정도가 안 멀쩡한 상태라는 것일까?  그 수준이라고 하면 과연 내가 속해 일하는 이곳은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중 발췌(66-67p)



어느 날 출근길에 만난 이 글귀에서 나는 그만 또 코가 빨개져버렸다.  하루 종일 기계처럼 쉼 없이 울려대는 전화기에 대고 설명하고, 수긍할 수 없어하는 사람에게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다른 어조와 어휘로 이해시켜야 하는 매일매일에서 우리는 모두 패병처럼 목을 꺾고 퇴근한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언어라는 게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무수히 많다.  아무도 나의 피로감과 무기력함을 긍정해 주지도, 관심 있어할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주변에는 아무도 없던 내게 작가는 깊이깊이 이해해 주고 토닥여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적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 Narrativitat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 Lebendigkeit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라는 말로 글을 맺는다.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육체는 멀쩡해 보이나 그 영혼은 헐벗고, 건강하지 않고, 심하게 결핍되어 있다는 뜻과 통하리라.  비록 영혼은 죽음을 앞둔 병자의 모습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을지언정 이러한 작가의 책들을 통해 숨이 넘어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영혼의 수혈을 받는다.  불과 1년 전 여의 나는 이 지루한 결핍의 시간이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대상에게 물어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젠가는 그 끝이 올 것이고, 나는 벌거벗은 생명이지만 살아남겠다고 결정했다.


언젠가는 그 끝이 오리라고 믿기로 했다.


그 끝으로 가는 시간 동안 좋은 책동무를 만나게 되어 고마울 따름이다.  내일은 월요일..... 말끔한 얼굴로 출근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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