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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지는 별 Dec 28. 2021

모든 것들이 이미 내게 있다

아침의 피아노 책 후기


기다림                                      바다에 지는별


기다렸던 봄비처럼

너를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정해진 계절에 봄비가 내리 듯,

너도 너의 시간에 나에게 올 것이라 믿는다


그 기다림은

혀가 쩍쩍 갈라지는 목마름은 아니지만,

작은 구름 한 조각 지날 때마다

비구름을 상상하며 너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나는 너의 계절을 알지 못한다

너를 기다리는 시간에 그저 나의 시간을 살포시 얹어서 갈 뿐


                                 2021.8.23. 출근하는 전철 안에서





어렸을 적의 기다림은 지루하고,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나이 먹고 무언가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은 결과에 상관없이 너그럽고, 따뜻하고 설레게 한다.  나는 지금의 나이까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희망하고, 기대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심히 깜빡거리는 커서처럼 그렇게라도 무심히 기다리고 소유에 대한 기대라도 했었다면 조금 덜 슬프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지만 그 무심이라는 것이 나는 잘 안 되는 사람이어서 그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 듯하다.


기다림과 희망, 소유와 가까울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늘  마지막과 이별을 먼저 떠올리는 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궁금해진다.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예쁜 제목이 눈에 들어와서 펼쳐 든 책,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아침의 피아노.


책 표지 아래에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럴 때?... 그럼 어떨 때 슬퍼하라는 것일까 궁금해 책뚜껑을 열었다.

나의 눈처럼 거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입을 꾹 다물고 선하게 웃고 있는

그의 약력은 철학아카데미 대표를 지냈고, 한겨레, 현대시학 등에 칼럼을 썼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철학을 공부하고 지금 시대에 깨어 있는 사람으로 살아냈다는 뜻 이리라.  


저자는 2017년 7월에 암 선고를 받고 임종 3일 전까지 병상에서 이 책의 글을 썼다고 한다.  책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 앞에 간결하고 짧은 단문으로 시작한다.



2. 마음 무겁고 흔들릴 시간이 없다.  남겨진 사랑들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  그걸 다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3. 지 내게 필요한 건 병에 대한 면역력이다.  면역력은 정신력이다.  최고의 정신력은 사랑이다.


13. 분노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뿐이다.


부족한 시간 앞에서 그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이외의 상념과 후회, 회한에 대해서도 사랑에 집중하기 위해 단호하게 정리를 해 버리는 저자의 현명함이 무척이나 열정적이다.  


41.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다.


그걸 자주 잊는다.


48. 나태 장세 니스트들에게 가장 불온한 죄악이었다.

그건 신만이 아니라 자기에의 신뢰를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49.  오래 살아야 하는 건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미루었던 일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애써 이 불가능한 삶과의 투쟁이 무슨 소용인가.


죽음 앞에서도 삶은 성실하게 지속해야 하는 책무라고 말하는 저자.  죽기 전에는 삶을 살아내라는 명령에 가까운 말로 다가온다.  성실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의무...


코 앞에 다가온 죽음의 시간에 허둥지둥 미뤄 두었던 숙제의 크기는 과연 얼마만 할까?  성실하게 차근차근 숙제를 해 온 사람들은 갈무리하며 여유가 있을 것이고, 허둥지둥 숙제를 하긴 하지만 너무 쌓아두었던 거대한 숙제라면 급한 것부터 해 나가겠만 숙제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큰 후회와 아쉬움 가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평소에 해 두어야 하는 삶과 인생의 숙제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이어 온다.



85. 지 살아 있다는 것-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99. 삶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100. 녹즙 마시고 이원을 출근시킨다.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앉았어도 구토감이 가라앉지 않는다.

-중략-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의 의연함을 지켜야 할 것이다.  돌아보면 살아오는 내내 겁쟁이였다.  불편함, 괴로움, 고통들 앞에서 늘 도피했다.  그래도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건 모두가 착하고 친절했던 주변의 타자들 덕이었다.  이제 그런 시간은 지나갔다.  다가오는 시간들,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의 인내와 힘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새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니 노래하자.


지금 살아 있다는 것에 집중하고 즐겁게 살아내기,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기.  모두 내가 제일 못하는 것들이다.  나름 열심히 준비하면서 최선을 다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아마도 그 답안을 수정해야 하나보다.  즐겁게 손님처럼 우아하게 살라는 작가의 말이 너무도 생소하다.  


117번의 작가의 말처럼  끝없이 도래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또 다가오는 것이 생의 진실이라면 지나치게 기뻐할 것도, 지나치게 슬퍼할 것도 없이 다가오는 것을 맞이하고,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게 놓아두라는 말일까?  하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단지 다가오는 것에 대한 기대와 그것들을 즐겁게 즐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뜻이겠지.  작가도 점점 죽음의 영역 쪽으로 발걸음이 기울 때 즈음 사랑의 중요성은 절감했지만 사랑의 주체로서 제대로 된 사랑을 했었는지, 주고받음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자신이었는지 죽음 앞에서 다시 한번 점검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꼭 안아준다.


122. 나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136. 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137. 나 살고 싶다.  나는 기어코 돌파해야 한다.  나의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


138. 우리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197. 산책길.  갑자기 가슴이 충만해진다.  내 안에 가득한 사랑들, 아름다움들.  그 찬미의 마음과 문장과 단어들과 음표들.  모든 것들이 이미 내게 있다.  나는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  팡제라의 아이처럼 우렁차게......


197. 내가 사랑했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많이 더 많이...... 이것만이 사실이다.


222. 함 슬퍼한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함께 메마른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때로 이 빛나는 세상을 껴안고 울고 싶은 것도 같은 까닭에서 일까.


226. 화해.

다투지 않기.


234.  마음은 편안하다.



쉼 없이 사랑하고, 다시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 점검해 가면서 다시 사랑하고, 그리고 화해하고 교감한 후 그는 마지막이 편안하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들이 이미 자기 안에 다 있다고 했다.  의문이 생긴다. 이미 모든 것이 충만한 자아가 있다면, 필요에 의한 관계의 또 다른 의미의 관계는 어떤 것이고, 어떤 느낌일까?  개인 각자가 모두 특별하고 귀하며, 완벽한 존재라고 한다면 우린 서로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관계가 될 수 있을까? 평소 인간관계에 대한 나의 생각에 많은 회의와 의문을 남기고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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